기독교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불교는 “원수란 현상일 뿐이요, 그 본질은 부처다” 라고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란 말은 “원수이기 때문에 사랑하자”는 말은 아니지요.
비록 “원수라 할지라도 그 조차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가 대체 뭘까요?
저는 그 이유가 다름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라고 봅니다.
그 이유 세 가지를 아래에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첫째로는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일중일체 다중일’의 법처럼 마음 안에 세상이 다 들어 있는데 그 안에 원수도 있으니
그 원한과 미움 때문에 얼마나 내 마음이 어둡고 괴롭겠습니까? 그 뿐만 아니라 몸도
독성 물질이 분비되어 온 몸의 세포들을 오염시키므로 심신이 다 고통받는 겁니다.
둘째로는 내 정신의 성장과 변화를 위해서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려면 먼저 12연기법에 의한 시비분별 작업이 필요합니다.
어째서 그를 미워한다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은데 원수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미워하고 싫어함은 다 내 생각 감정이 분별 작업한 결과입니다.
즉 육식 활동의 창조 행위가 만든 피조물이며 나만의 부정적 마음 세계란 겁니다.
마음이란 본래 찰라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허망한 것인데 그 어둡고 부정적인
현상에만 머물고 있다면 그건 내 영성의 성장과 변화에도 백해무익합니다.
셋째로는 진리가 보는 안목에서는 우리는 본래 다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끼리 싸울수록 그 부모님 가슴은 미어지고, 서로 사랑할수록 부모님께서
행복해 하시는 이유는 부모님 눈에는 다 같은 자신의 분신(分身)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인 하나님, 부처님 관점으로 볼 때는 그저 충만한 사랑과 자비심 속에서
자녀들을 보실 뿐 옳고 그르냐를 시비분별하는 마음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즉 내가 상대를 보는 눈(수준)에 따라 상대가 밉게 보이기도 하고, 또는 사랑과
자비심 속에서 측은하고 가엽게 보이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상대가 뭐로 보인다는 건 곧 내가 그렇게 보는 수준이란 말이지요.
그렇다면 사소한 것까지도 다 시비분별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사랑과 자비심으로 충만한 채 모든 존재에 대해 측은하고 자상하게 보는 게
나 자신에게 더 좋을까요?
나는 내가 나라고 결정하는 그것이 되며, 내가 쓰는 마음 수준 그대로 변해갑니다.
그러므로 자비심으로 충만할수록 내가 더 행복해지고 편안하게 되는 거지요.
우리가 모든 관계에 크고 충만한 자비심과 사랑을 가질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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