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알아차림을 알아차림’이란 좋은 책이 나와 감흥 깊게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한다면 ‘의식하는 것을 의식하는(동사형)’일 것입니다.
여기에 왜 (동사형)이라 했냐면 명사형이면 생각에 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을 의식하는 자기의 ‘의식을 의식하는’ 것이 바로 [초견성]입니다.
자기의 의식을 한번 의식해보세요.
그럼 자기가 여태껏 얼마나 의식의 초점이 가서 머무르는 곳에
마음이 정신없이 따라가 들러붙었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즉 대상만 보고 분별했지 정작 보는 것(행위)엔 관심을 두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의식을 의식’해 보니 세상은 그저 거울에 비춰진 풍광 같아
의식의 초점이 가서 머무르면 있음이 되고 스쳐가면 있고, 없는 것도 아닌 게 됩니다.
이걸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뭐가 [견성]인가?
초견성은 진공 묘유(眞空 妙有)에서 묘유(妙有)만 보지만 견성은 진공도 봅니다.
이 말은 곧 ‘의식’이란 것도 미세한 분별임을 봄과 동시에 '의식'이란 분별(생각)조차
솟아나오는 도무지 보이지도, 알 수도 없는 자리가 이미 함께 함을 보는 겁니다.
이 자리는 있다, 없다고도 할 수 없으니 왜냐면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모든 분별이 사라진 멸진정이며 동시에 의식에 비춰져 나타난
모든 풍광들이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해인삼매요, 불국토가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선 깨달음을 보다 더 분명히 한다든가 더 많이 체험하겠다는 추구심도
전부 다 내 욕심이었으며 분별이자 번뇌망상이었음을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나란 현상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더 이상 그것만이 나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참나는 이 모든 우주 전체를 비추며 품고 있는 알 수 없는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하실 것은 만약 이 말을 또 생각과 느낌으로 붙들고 실현 체험코자 한다면
그것은 이 말 자체에 붙잡혀 머무르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이 진짜 가리키는 건 이미 있는 그대로가 진리이니
늘 ‘응무소주 이생기심’할 뿐 다시 또 지금 뭔가를 붙잡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