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나 불교나 한결같이 자기를 비우고 버리며 내려놓으라 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완전히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는 과거의 내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그 만큼은 과거에 영향받은 채 새롭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욕심 많은 인간일수록 나와 내것을 부정하고 비우기가 너무 힘듭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사실 얼마나 많이 나와 내것을 고집하면서
울고 저항하며 떼쓰기까지 하면서 버텼던가요?
부모는 내게 더 좋은 걸 주려거나 가르쳐주려 했지만,
우리들은 죽을 만큼 괴로워하며 지키려고 발버둥치지 않았습니까?
지금이라고 그런 게 없을까요? 아니, 오히려 그 가짓수가 더 늘었을 겁니다.
깨어나보면 정말로 예수나 석가께서 자기를 부정하고 나를 따르라든지,
가장 소중한 나와 내 것을 없다거나 공하다고 한 가르침의 참뜻에 전율하게 됩니다.
그건 나와 내 것이 무조건 다 허무하거나 일체 환영이라서가 아닙니다.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한 영원한 보배가 있는데 그걸 갖고 누리지 못한 채
저열한 것들을 붙들고는 그게 최고인 줄로 착각하며 어리석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낡은 것을 놓아야 더 좋은 새 것을 붙잡을 수가 있는 거지요.
그래서 그토록 기독교나 불교는 ‘절대적 무소유와 청빈’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무소유와 청빈이 상대적인 게 아니라 절대적임을
요구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알거지가 되란 말이 아니라,
‘얼마나 가졌든 간에 그것에 집착하거나 전혀 영향받지 않는 자유’를 말하는 거지요.
이것이 바로 [변치않는 본질 자리에서 변하는 일체 현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변치않는 본질 자리란 공(空)한 거 외엔 없습니다.
일단 뭔가가 어떤 형태(色)로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늘든 줄든 변하게 되어있으니까요.
즉, 공(空)해야 무한한 창조가 가능합니다.일단 어떤 꼴로 나타나면 그 형태를
버리고 떠나지 않는 한 더 이상의 창조적 변화는 불가능해집니다.
이런 진실을 본다면 왜 성인들께서 그토록 무아와 무소유를 강조하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건 내가 있다가 없어지는 상대적 무아나 돈이 많다가 잃는 무소유가 아닌
지금 내가 있든 없든 간에 상관없는 무아를 말함이며, 얼마나 가졌든 못 가졌든
그것에 영향 받지 않는 텅 빈 공함, 즉 자유함을 말하는 겁니다.
이 진리는 그게 정신이든 물질이든 간에 상관없이 다 적용되는 절대 법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空)이란 생각에 떨어져(그러면 색이 된다) 반드시 가난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그렇다고 반대로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체의 것들로부터 완전한 '자유함' 입니다.
그것이 진짜 공(空)이며 창조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나와 온 세상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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