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를 쉽게 말하면 ‘나를 지켜보는 자로서 같이 살라’는 겁니다.
자꾸 자기 생각 따라 다니지 마세요.
감정이나 감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다니면 결국은 그 ‘조무래기, 부하’ 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이토록 우리는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힘들까요?
그렇게 살아온 게 이젠 벗겨내기 힘들 정도로 습관 중독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활동하는 것을 아끼는 애완용 강아지 보듯 살펴보세요.
사랑하니까 몸에 안 좋은 것 못 먹게 하고
위험한데 가겠다고 뛰어가도 목줄 당기며 말리지 않습니까?
왜 강아지한테 그러면서 자기에겐 안 그러나요?
긴 세월 살아온 자기의 모든 경험과 기억(생각)이 지금 실제로 어딘가에 있나요?
전부 환영이나 정보 이미지로서 내 머리(마음)에 저장되어 있다가 서서히 잊혀지고 지워져가지 않습니까?
오직 지켜보고 아는 자(앎)만이 변함없이 있지 않나요?
심리학도 마음을 경험하는자, 기억(생각)하는자, 지켜보는(아는) 자로 나눕니다.
정신과 의사이며 교회 장로이신 채정호 교수님도 ‘영성 챙김’이란 자신의 최근 출판 저서에서
사람 마음을 불교처럼 이렇게 나누는 것보다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석법은 없다고 스스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지켜보는 자리에서 경험하고 기억(생각)하는 것들을 조용히 관조할 때
그것이 바로 명상이며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 내면에 찾아오실 환경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타 종교인도 실제 명상을 해보면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 분은 끝까지 자기 말씀대로 못하고 결국은 자기 마지막 생각에 또 다시 붙잡히셔서 좀 아쉬웠습니다만)
왜냐면 바르게 지켜보면 볼수록 누구나 더 정확한 실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진리를 찾는다면 우리 일생의 경험 속에서도
일단은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은 자꾸 변하지만 지켜보는 자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 하나 외엔 다 변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사후에도 영혼이든 생명 에너지든 뭐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지켜보는 힘(생명력)밖엔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일단 진리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것에 집중해보란 겁니다.
이게 바로 명상과 참선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공부한다면서도 대다수는 하루 종일 아무 생각없이 자기 몸과 생각,감정(마음)만 쫓아다닙니다.
그러니 남들은 다 되는데도 자긴 공부가 안되는 겁니다.
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유한한 이 몸과 변덕스러운 내 생각, 감정을 지켜보세요.
마치 사랑하는 애완견 바라보듯이 주의를 집중해서.
그러면 일상이 참으로 고요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면서 삶이 마치 잔잔한 호수 위에서
잔잔한 물결을 장난으로 만들며 가볍게 움직이는 바람처럼 변하게 됩니다.
이런 삶이 얼마나 가볍고 경쾌하며 행복한지는 해본 사람만이 경험합니다.
그걸 해탈이라고 말하는 것 뿐입니다.
지켜보는 자가 곧 '정신'이며 우리의 생사를 넘어가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니 몸과 마음은 힘 좀 빼시고 그 힘을 이젠 [지켜보는 자]로 좀 옮겨보세요.
몸과 마음에 그토록 투자하고 신경썼지만 그래서 부귀영화 좀 누리셨습니까?
아니잖아요? 고생만 실컷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다 압니다.
실은 저도 깨어나기 전엔 그게 전부인 줄로 알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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