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부하 직원이나 자녀에게 의도 된 화를 내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렇게 계산 된 화는 나를 쥐고 흔들거나 정신을 빼앗지도 않은 채
아주 적당한 수준에서 필요한 화를 내고 다시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가라앉습니다.
그런 화는 몸과 마음의 영역에선 화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걸 계산한 정신의 영역에서는 냉철하게 그 연기(演技)를 바라보고 있을 뿐 전혀 휩쓸림이 없습니다.
그 경험을 보다 더 자세하게 분석해보면, 마음속(육식활동) 생각과 감정이 만든
화(변형된 일시적 에너지)는 몸에 반영되어 얼굴 표정과 몸짓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걸 바라보고 아는 정신, 즉 [앎]의 영역(내면)은 밝은 빛으로 텅빈 채
여전히 깨끗하고 청정한 채 살아서 작동합니다.
즉 화내는 생각 감정과 그걸 아는 이 [앎]사이엔 물과 기름같이 서로 섞이지 않는
미묘하게 다른 간격이 있는 겁니다.
이 간격(틈)을 자각하고 알아차리면 일단 [앎]에 존재의 중심이 옮겨지므로
정견(正見)법을 터득한 것입니다.
이 [앎]이야말로 생명 법신(O)을 볼 수 있는 절대적 필요조건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자각하는 게 곧 O을 보는 거라는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왜냐면 아직 그 [앎]에 “이것은 앎이다”란 미세한 내 생각이 들러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앎]이 일상화된다면, 그래서 모든 언행에서 늘 같이하게 된다면,
자연히 나도 생각+느낌이므로 나를 대상으로 인식할 때 그 생각과 느낌의 환영성이
보여져서 결국 무아가 되며 이것은 모든 법(생각)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므로,
일체가 다 환영처럼 보여져서 세상이 있어도 다 허깨비처럼 보여 공하게 됩니다.
그럴 때 이 O자리가 반사적으로 드디어 앎의 몸통으로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은 육식 활동에만 꽂혀있던 내 의식이 비로소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알던 이 국소적이던 [앎]이 돌연 무한히 커져서
끝없는 우주 전체를 다 삼켜버리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앎에서 생각(이름)이 분리된 겁니다.
그러면 [앎]은 곧 O의 눈에 해당하며 O은 곧 앎의 몸통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몸과 눈을 생각 속에선 분별해 나누지만 실제로 살 때는 몸과 눈은 항상
나눌수 없는 혼연 일체로 '둘인 채 하나요, 하나인 채 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성하면 “우주 법계 전체가 다 하나의 눈이 된다”라는 선어(禪語)도 있습니다.
계산된 분노가 가능하다면 누구나 집중만 하면 이 [앎]자리로 옮겨갑니다.
그렇다면 계산된 생각이나 느낌은 불가능할까요? 아닙니다. 해보면 다 됩니다.
즉 당신이 충분히 자각 집중만 한다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늘 이 [앎]의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건 머리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직접 스스로 실험하고 체험하는 문제입니다.
(이토록 일러줘도 직접 안해 보면 안되고, 해봐야 됩니다. 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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