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길을 [길 없는 길]이라고도 부릅니다.
왜 길이 없다고 하냐면 길이 있다 하면 생각 속에 빠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에서 벗어난 자리에는 아무런 가야 할 주체도 대상도 벙법도 없습니다.
오직 생각 속에서만 내가 있고 해야 할 일도 있으며 대상도 생겨나는 거니까요.
그런데 그 속에서 길을 가야 한다니까 이거 환장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즉 생각을 여의거나 있어도 없는 것같은 상태에서만 깨달음이 가능하단 겁니다.
이게 되려면 정견함으로 일체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임을 스스로 보면 됩니다.
그러려면 우선 색(色)이 무엇인지부터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색(色)이란 뭐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글을 더 읽기 전에 잠시 스스로 이것부터
먼저 정의를 내려보세요. 그런 다음에 제 글을 더 읽으면서 답을 맞춰보세요)
색을 바로 이해 해야지만 공도 똑바로 알고 바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색(色)이란 ‘감지(感知)될 수 있는 모든 것(생각으로 뭐라고 규정되는 일체)’을 말합니다.
(어떤가요? 당신의 답과 일치합니까? )
감지(感知)란 것은 감각이나 또는 감(感)으로 어림잡아 생각으로 정의를 내리거나
분별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감지가 안되는 것이라야 색(色)이 아닌 공(空)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을 깨달으면 깨닫는다거나, 공을 다른 말로 “오직 모를 뿐”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생각으로 안다 모른다 하는 그런 모른다가 아닙니다.
이때의 오직 모를 뿐은 ‘뭔가가 있는 듯한데 그렇다고 꼭 집어서 뭐가 있다고
말로(생각으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나온 내 삶에 뭐가 있었냐고 질문받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다(무)하기보다는 ‘잘 모르겠고 뭐가 있었던 듯한데 실제로는 없는 듯’
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생각으로는 도무지 단서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를 (분별이 되지 않기에) 공(空)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뭐가 있는 듯 없는 듯 하다’고 감(感)은 잡을 수 있지만 딱 부러지게
‘이거다 저거다(텅 비어있다, 뭐라할 게 없다 등등)라고 정의를 내리거나 분별할 수는 없다 보니
결국 모르겠다(不知), 즉 감지(感知)가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태까지 눈앞의 세상을 다 생각으로 분별했기 때문에
뭐든 다 감지된다고 착각한 결과 모든 색(色) 현상에만 충실했을 뿐
그것들의 배후에 모든 게 나타나고 사라져가는 보이진 않으나
분명 존재하는 공(空)자리를 똑바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 생각에 갇힌 무명(無明)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공부인은 반드시 모든 색(色)들이 항상 색(色)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나타나기 이전 자리, 그리고 나타나 자꾸 변하다 결국 사라져간 자리인
공(空)도 늘 같이 그 본성으로서 동전의 앞 뒷면처럼 딱 붙어있음을 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걸 보는 것을 도(道), 즉 길이라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이게 색(감지되어서 분별 규정가능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냥 자꾸 변해가다 사라지고 그런가 하면 또 다시 연기법에 의해 끝없이 나타나고 ,
이걸 끝없이 반복하는 것을 "영원히 살아있는 생명(법신)"이라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길 없는 길'이란 곧 공을 볼 때 갈 수 있는 길이며,
이 공(空)자체가 스스로 살아있어 늘 연기법 따라 색(色)으로도 변하기 때문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달리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바로 이런 세계의 실상을 보는 겁니다.
내 생각이 분별 규정한 허상 세계를 현실이라고 더 이상 믿지 마세요.
진짜 현실(실상)은 이런 내 분별 망상이 지금 나만의 주관 세계를 창조하고
그 속에서 나 스스로 허상인 누군가와 싸우거나 대립하면서,
또는 자기 생각 감정에 불과한 것들에 저항하면서 괴로움을 스스로 창조 체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걸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내가 색이라고 감지한 것들이 본래 공한 것임을 정견하는 것 뿐입니다.
이걸 길이라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하기도 그러니 '길 없는 길'이라 부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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