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이나 유마경에서는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즉 깨달았다고 해서 따로 ‘새롭게 얻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러면 마음공부 해봤자 다 똑같다는 말이 아닌가요?
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마음(생각)이 자기일 때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시작하지만
정작 깨닫고 보니(마음이 물러가고 생명 법신 자리가 드러나 그 법신의 눈[법안]으로 다시 보니),
이 생명 법신 자리는 본래부터 살아 여전히 그대로 활동하고 있었음에도
눈을 못 떠 그걸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깨닫기 전이나 깨닫고 난 후나
늘 여여한 생명법신자리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마음(생각과 느낌)자리에서는 이게 180 도로 달라집니다.
모르던 것을 알았으며 전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렇게 깨닫기 전후가 다르다는 건 생각이 만든 내용물로서 분별입니다.
그러니까 분별만 하지 않으면(분별 속에 빠지지만 않으면) 깨닫기 전후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항상 생명과 의식이 살아서 화살표로 활동하고 있을 뿐 달라진 것은 본질적으로는 전혀 없는 겁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법신 차원의 말이고 실제로 마음의 차원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있게 됩니다.
간단히 말해 모든 번뇌가 더 이상 번뇌가 아니게 되며,
설사 아직 공부가 미진하여 조금 괴로워도 그 괴로움을 초월해있는
생명과 은총의 빛으로 충만한 자리가 드러나므로 괴로움에만 빠져있을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의 활동 차원이 높아져 깨달음의 지복감을 누리는 건 달라졌지마는
그건 일시적 마음 현상(느낌)의 생멸이므로 본질이 바뀐 건 아니란 말입니다.
중요한 건 깨달음에 대한 자기 규정(생각 질)에 붙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즉 ‘깨달아서 얻은 게 있다’는 것도 생각(규정)이며,
반대로 ‘무 소득이라 했으니 얻은 게 없다'고만 여기는 것도 자기 생각(규정)입니다.
자기 규정에 갇히면 양 변 중 어느 한쪽에 치우쳐 살아있는 생명의 활동성(중도)을 놓치고
자꾸만 어딘가 죽은 관념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게 둘이 아니란 말의 포인트입니다.
하지만 ‘둘이 아니다’라고 해서 '그럼 하나구나' 하면 그것 역시 자기 규정입니다.
이게 생각과 논리를 허용치 않는 불교 마음공부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핵심은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이 둘이 아닌 아무 분별이나 일도 없는 채
스스로 항상 살아있는 생명성(법신, 성품) 그 자체로 활짝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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