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분들이 보통 때와 다른 뭔가를 체험하고는 자기가 견성했다고 오해합니다.
저도 2002년에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오해를 내려놓는 데 6년이나 걸렸습니다.
이것은 견성(見性)에 대해 그 본질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해프닝입니다.
십우도에서 보듯이 견성(見性)에는 여러 단계의 과정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처음엔 소(법)를 찾으려고 애를 쓰고 중간 단계에선 소하고 씨름도
하지만 나중엔 그 소도 분별이라서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간
단계에서 뭔가를 붙잡고 머물게 되는데 그때는 법광(法狂; 에고가 법을 붙잡고
설치는 증상)이 생겨서 차라리 이 공부를 안함만도 못한 게 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견성(見性)의 말뜻은 “성품을 보는 것”이며 첫 단계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소를 본다는 말의 뜻). 하지만 중간 단계에 가면 “보고 아는 것이
성품”임을 증득하게 되며 후반부에서는 “나와 세상 모든 게 다 성품 자체”가 되고
마지막엔 그것도 내려놓아서 원래 이 공부를 시작하기 전과 비슷하게 돌아옵니다.
그걸 조주 선사께서는 “평상심이 도”라고도 말씀하신 거지요. 평상심이라고 해서
물론 이 공부를 안한 것과 똑같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평범한 삶의 모든 일상과
매순간들이 전부 다 본래 이것(O)임이 확연하게 보여서 따로 뭔가 어떤 경계나
체험을 붙들고 유지할 게 하나도 없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과정을 십우도 그림도 상세하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초기 단계나 중간 단계에 있는 공부인이 중생 구제를 하겠다고 나선다면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자칫하면 법광(法狂) 속으로 끌고 가게 됩니다.
자기가 남에게 전하려 한 것이 나중에 보니까 그 수준의 분별 집착이더라.
이걸 다시 또 보게 되면 그땐 자기 아만심과 무지함이 부끄러워서 어떻게 머릴들고
다니겠습니까? 제가 조그만 경계를 성취하곤 와서 큰소리치는 분들에게 그건 아직
반딧불에 불과하니 더 공부하라고 당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남도 아닌 본인 자신을 위해서 그런 겁니다.
왜냐면 나중에 반드시 창피해 하고 후회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충분히 익고 나서 한번 주변에 구제할 중생이 있기나 한지 살펴보세요.
제 눈에 누군가 중생이 먼저 보인다면 그건 에고가 가진 교만심에 불과합니다.
상대가 먼저 보여주기 이전엔 다 부처로 보여야 제대로 공부한 것입니다.
누군가 말했지요. "너나 잘 하세요~ !" 정말 마음공부에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눈속을 먼저 보라."
그러니 우리 겸손하게 하심하고 자기 공부부터 열심히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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