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스스로 존재하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 인식 활동의 산물로서 그 순간만
경험되는 걸까요? 우선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존재는 우리가 그걸 인식하지
못하는 한 우리에겐 없는 것이며, 반면 존재 현상이 없다면 우리가 인식할 대상도
없기 때문에 결국 이 두 가지는 서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공존한다는 겁니다.
그 유사한 사례로서 일반 물리학과 양자 물리학의 관계를 들 수가 있습니다.
일반 물리학에선 너무 당연한 법칙들이 양자 물리학에선 하나도 성립되지 않지만
이 두가지 세계는 엄연히 우리의 의식 세상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과학자들도 그 이유를 아직은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연기법은 아주 훌륭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것에 의해서
저것이 드러나고 반대로 저것이 있기때문에 이것도 생겨나서 인식될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즉 연기법은 우주 자연 현상을 하나의 통합적 ‘움직임’의 관점에서
설명해주는 탁월한 비 이원론적 관점인 겁니다.
그러면 이런 존재와 인식 경험의 사이에서 우린 어떤 쪽을 선택해야만 할까요?
적어도 나 자신과 우주 대자연을 일으킨 창조력의 비 이원성(그 이름이 하느님
이든 부처든, 성품 자리든 알라신이든 간에)을 종교인, 영성인에겐 이것은 있는
그대로 모두 수용할 뿐 어느 한 쪽만을 선택해야할 문제는 아닌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밸런스(중도의 균형)’가 중요하게 등장하게 됩니다.
둘의 상호 의존성을 부인할 수 없다면서 그냥 이해만 한다면 그것은 생각에만
머무를 뿐이지 생각이 감지 못하는 체험 영역은 전혀 알 수없게 되어버리는 거지요.
바로 여기에서 양쪽을 다 체험하되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지혜가
필요하게 됩니다. 물질(몸)과 인식(체험) 사이에서 우리는 그동안 어느 쪽을 훨씬
더 많이 인식 체험했을까요?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존재(물질과 몸)차원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영성 공부를 하는 이들에겐 물질보다 인식(체험)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방편상으로 그렇게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물질 쪽으로만 치우쳐 살아온 사람을 균형잡게 하려면 당연한 이치입니다.
저는 여태까지 이 방향의 얘기를 여기에 쓰거나 모임에서 강의해온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원래의 있는 그대로를 체험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이걸 어느 쪽이 더 옳고 틀리냐의 문제로 분석하거나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그런 관점으로 따지고 분석한다면 그 목적은 단지 대상으로 알자는 것일 뿐 내가
되자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존재론과 인식론은 앞서도 얘기했듯이 연기법적으로
상호 의존하고 있기에 어느 한쪽만이 더 옳고 그른 게 아니라 단지 관점일 뿐입니다.
반야심경에서 궁극의 진리를 [색즉시공 공즉시색]으로 설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의 체험을 위해서는 머리로 대강 아는 데 그치지
말고 우리가 등한 시 했던 유식(唯識; 오직 의식 뿐)의 경험 세계 속으로 한번 깊이
들어가봐야 합니다. 그래서 유식을 공부하지 않으면 이 세상의 실상도 제대로
온전히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쪽은 끝까지 아는 데 반대편은 잘 모르니까요.
깨달음은 이렇게 갈라진 두 세계의 비 이원성을 동시에 체험할 때 일어납니다.
부처님 말씀도 그렇지만 모든 선지식의 말도 다 이러한 중도의 체험을 위한 한때의
방편들에 불과합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배웠던 상식이 대학 이상에 가선 부인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모든 말들은 결국 진리를 가리키는 한때의 일시적 방편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지당한 말씀인 게 안목이 더 밝아지면 아니게 될 수도 있는 겁니다.
항상 지금 '뭐가 더 옳은가'가 아니라 지금 '뭘 향해야 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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