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우는 아침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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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정보에 오염되지 않은 눈(2026.08.04.) 부처에겐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의 다섯 가지 눈(眼)이 있다 합니다.
인간의 눈은 살아오면서 접했던 기억과 정보에 오염되므로 나이가 들수록 본래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오염된 생각, 감정, 감각의 파동(이를 ‘카르마’
라고 합니다)속에서 대상을 극히 주관적으로 바라봅니다.
중생에게 ‘본다’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12 연기의 과정을 거쳐 생멸 유전하면서
탐진치(욕망, 분노, 어리석음)를 양산하게 됩니다. 이런 중생의 삶은 결국 본다는
행위를 통해 또 다른 카르마와 잠재 의식을 확대 재 생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중생의 ‘봄(視)’은 깨어난 이의 ‘봄(見)’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중생의 봄에는 시(示)변이 붙어있는 바 이는 어떤 ‘의도’가 있음을 뜻합니다.
‘의도’를 갖고 본다 함은 기억과 정보에 오염된 상태로 본다는 것이니, 그것은
본래 있는 그대로 태초의 순수 무구한 ‘봄과 앎’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런 중생의 눈길은 늘 기억 정보와 함께 움직이며 상대를 탐색합니다.
우리는 이미 일상 속에서 순수하지 못한 그런 눈길을 많이 눈치채면서 삽니다.
그런 눈길은 탐진치 속에 이미 오염되어 있어서 또 다른 문제를 자꾸 만듭니다.
하지만 본인은 자기 눈길이 이미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어둠과 번뇌의 확대 재 생산이 반복되는 삶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무명의 삶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안에서 기억과 정보에 오염
되지 않은 눈을 뜨고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거듭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란 말로 대변되는 중도(中道)는 더러움을 다 씻어낸 깨끗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중도는 과거의 오염된 눈이 보고 아는 것들도 다
보고 압니다. 그래서 부처는 중생의 마음 속도 다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높고 크며 자비와 지혜로 충만한 법안, 불안을 가졌기에
중생의 수준을 훌쩍 넘어서 있는 정신 차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 걸맞는 삶의 질과 양을 누리고 즐기게 됩니다. 돈만 많아도 가난한
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을 사는데 하물며 정신적 차원이 다르면 어떨까요?
기억과 정보에 오염되지 않은 눈으로 세상과 대상을 본다면 두려움과 상처가
일체 없으며 인간의 눈을 넘어서는 영적 시력을 갖게 되므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게 되며 하늘 나라가 이미 임재해 있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몸과 마음에서 살아오면서 받고 쌓인 기억과 정보의 흔적을 최대한
지운다면 적어도 당신은 이런 저런 기준을 갖고 남들을 쉽게 규정하지 않은 채,
늘 새로워 경이롭고 생명력 충만한 우주 정신과 생명의 결정체(꽃)들을 도처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거듭나기 위해 [조(정)견 오온개공]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정견을 통해 살아온 기억의 흔적과 상처들을 지우고 어느 것에도 일체
오염되지 않은 태초의 눈을 회복할 때, [나]란 존재가 해체되고 새로운 생명으로
재 탄생하게 됩니다. 이것을 해탈 열반이라고 이름 부르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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