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 누구나 잠시 요술만화경(모르는 분은 네이버를 찾아보세요)을 갖고
놀아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요술만화경은 긴 직사각형의 거울 조각 세 조각과
원형의 간유리 한 조각, 그리고 잘게 썰어 넣은 색종이 조각들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이게 왜 ‘요술’이란 글자가 들어가냐면 만화경을 움직여보면 조각난
색종이들이 그 안에서 세 조각 거울에 난반사되면서 무한대칭꼴로 움직이며, 온갖
기기묘묘한 형상과 모양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만화경의 비유를 드는 이유는
이게 몸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와 완전히 똑같기 때문입니다.
만화경 한쪽끝에 있으면서 움직이는 색종이조각들은 육식활동과 똑같습니다.
색종이들이 작동하며 만들어내는 무한한 조합과 모양들은 육식활동들이 작용해
만들어내는 무한한 생각, 감정, 느낌, 분별상들과 같이 끝없이 작용하며 변합니다.
아이들은 그걸 보는 게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봅니다.
어른들이 육식활동 가지고 재미있어서 시간가는줄 모르고 수다 떨고 노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만화경 구경은 결국 허망한 놀이에 불과하듯이,
우리들 삶도 결국은 그렇게 허망한 육식기능을 갖고 노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면 남는 것 하나 없이 허망하게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데도 이런 삶을 그냥 지속하는 것은 이런 삶 속에 그래도 뭔가 있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이나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런 건 없습니다.
그래서 경전은 모든 걸 '필경에는 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실상을 모른 채 그냥 잠자고 있는 삶’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이런 삶의 허망함을 직관하고 스스로 자기의 실재함 안에 숨겨져 있는
보이지 않는 비밀과 진실을 찾아낸다면 그것을 ‘깨어난 삶’이라고 하는 겁니다.
깨어나려면 또 다른 색종이인 제 생각과 느낌 속에서 신(실재)을 찾으면 안 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래서 허망하게 죽어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만화경을 보고 경험하는 '그것'(者)을 찾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색종이에 불과한 생각, 감정, 감각, 느낌만 쫓아다니며 여전히 생각으로만 찾습니다.
반면 현명한 자는 지금 이순간 이글을 보며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것이 삶을 부여하고 모든 걸 다양하게 창조하고 인식분별하며 살아가는 것임에
스스로 깨어납니다. 실재인 이것 없이는 만화경을 보고 다양한 변화를 즐기거나,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차리고 모든 삶의 순간들 속에서 이것이 홀로
경이롭게 빛나며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봄을 '깨어남'이라고 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