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부인이 죽었을 때 장자는 유해 앞에서 북치고 노래하며 춤추었다고 합니다.
그 소문이 동네에 퍼지자 이웃 마을에 사는 친구가 찾아와 나무랬습니다. 그러자
장자는 이리 답했다고 합니다. "이보게. 대자연에는 오늘도 수많은 탄생과 죽음이
일어나고 있네. 이 자연스러움을 슬퍼하란 말인가? 왜 인간만 그래야 하지?"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각에 너무나 많은 무게를 부여하며 생각 속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자연 속에 있는 생명체 중에서 스스로 심각할 줄 알고
또 자주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마도 인간 밖엔 없을 겁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그 사람이 예의(禮儀)를 안다고 칭찬할 겁니다.
하지만 예의의 본래 뜻이 뭔가요? ‘다같이 이렇게 해야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는
일종의 묵시적인 규정이 아닙니까? 그래서 누군가가 그 규정을 어기거나 모르면
우리는 그 사람을 욕하거나 모자란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예의를 갖춘 대접이나 취급을 받지 못해서 불편해졌다면 그것도 문제가
아닙니까? 왜 그렇게 보이지 않는 법칙에 얽매여서 남의 언행이나 반응까지를
일일이 신경쓰며 예민하게 살아가야 합니까? 남들이 그러니 나도 그래야 합니까?
한창 잘 뛰어노는 아이들이 심각하고 진지한 거 보셨습니까? 진실을 말한다면
생각이 많으니까 심각하고 진지한 겁니다. 마음 속에 ‘너는, 이것은 이래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지켜지지 않으니까 심각 모드(mode)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누구나 즐겁고 행복할 땐 절대 심각하거나 진지하지 않습니다.
해탈한 사람은 남을 위해서라면 모를까, 절대 스스로를 위해서 심각 진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럴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심각 진지하다는 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 감정, 감각 느낌이 얽혀서 만든 탐진치에 빠졌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원래 평안하고 행복하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깨달으면 그런 원래 상태로 돌아가서 늘 평화와 지복을 누리는 거지요.
어린아이들을 보면 원래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자기를 위해서 지금
심각하고 진지하다면 뭔가 잠시 자기 생각과 감정의 내용물에 속은 겁니다.
우리도 때때로 자기가 “지금 사소한 걸 갖고 너무 심각한 게 아닌가?”
이런 자각을 할 때가 있지 않나요? 생사를 당연하게 보는 장자 만큼은 못되어도
일상에서 이걸 알아치리는 것만으로도 우린 즉시 평안과 안도감을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매 순간 [보고 앎]. 이게 바로 자기 생각에서 깨어나는 방법이지요.
해탈하려면 (남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인간 사회의 생각이 만든 규칙도
본래 전부다 공한 것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물며 남들의 그런 시선과 언행에
걸려 신경쓰면서, 오히려 자기가 화내거나 불편해 할 필요는 전혀 없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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