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누가 만들어낸 것(유위)이 아니고 본래 그러한 것(무위)입니다.
그래서 진리 공부를 하는 이는 없다가 생겨난 것, 자기가 얻은 것을 추구하면
안되며 본래부터 항상 있었던 것 안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님이 대각을 하셨을 때 마지막 순간에 마왕 파순이 나타나서
방해를 하면서 부처님께 묻습니다. “ 당신의 깨달음이란 게 당신 생각과 느낌이
교묘하게 만든 허구일지도 모르지 않느냐? 과거에도 몇 번이나 그랬듯이 당신은
지금도 자기 생각과 느낌의 장난에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부처님은 손으로 땅을 짚으시니 그걸 본 마왕 파순은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뭘 뜻하냐면 땅을 짚어서 땅임을 느끼는 것은
생각과 느낌이 만든 게 아니며 본래부터 있던 진리 자체란 답변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사성제의 진리와 그걸 성취하는 팔정도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팔정도의 길은 첫 번째가 정견(正見; 있는 그대로를 보고 앎)함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정견(正見)은 내가 어찌하기 전에 이미 무위(無爲)로 저절로 되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정견은 내 생각이 해석한 뜻(바르게 본다)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 말은 “정견하는 법”이지만 실은 내게 이미 되어지고 있는 정견(正見)을
스스로 발견하고 깨어나야 하는 겁니다. 당신이 화가 날 때, 당신은 이미 자기를
잘 정견하고 있기에(되고 있기에) 자기가 화가 났다는 것을 보며 압니다.
누가 어려운 말을 하면 “모르겠어”하는 것도 생각이 시켜서 하는 말입니다.
생각은 자기가 이해하려고 해서 되면 안다고 답하고 안되면 모른다고 합니다.
그럴려면 자기의 그런 의식 활동 상태를 자기가 보고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정견(正見)은 이미 당신 안에서 잘 작동되어지고 있는
진리의 활동 현상이란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당신은 까치 소리를 들으면 까치 소리를 듣고 분별하는
자기의 의식 활동을 알기에 즉각 “까치가 운다”고 아는 것입니다. 맛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매운 걸 먹으면 “맵다”고 합니다. 이걸 아는 게 ‘정견’ 때문입니다.
하지만 뭔가 골똘히 생각할 땐 까치가 울어도 뭔 소리가 났는지 조차 잘 모릅니다.
이런 의식 활동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오감(1~ 5 식)을 이용해 보고 듣는 건 오감이나
생각(6 식)이 아니라 9 식(본래 면목, 불성)이기 때문이란 진실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모든 1~ 6 식 활동에는 항상 9 식이 밑바탕에 먼저 깔려있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아직 "정견은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이 잘 모르겠다는 것은 여전히 생각으로만 뭐든 해석하고 이해하려 하는
그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생이란 생각 중독증 환자를 말합니다.
"잘 모르겠다"고 답하는 그 생각을 이 순간에도 자기가 잘 보고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것이지 생각이 나인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9 식)없이는 아무것도 바로 보고 듣고 느껴서 무엇인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설사 눈으로 뭘 보고 있어도 의식의 초점이 딴 데가 있다면(다른 생각을 한다든가),
그 대상은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갓 죽은 시체는 눈 귀 코가 멀쩡해도 아무것도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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