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컵이 있다고 합시다.
컵이란 것은 이름이며 실제의 ‘뭘 담을수 있는 그 물건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니 깨어나려면 반드시 이름인 컵에 붙잡히지 말고 실제의 그 물건 자체를 보고
인식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달을 가리킨 손가락과 진짜 ‘달’의 차이입니다.
생각하지 않을 때에도 우린 ‘아무 것도 아닌 상태’로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 아무 것도 아닌 상태를 일단 무심(無心)이라고 이름지어 봅시다.
하지만 이 이름은 다만 그 이름이 무심일 뿐 실제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다만
이름(銘)일 뿐이지 무심이란 이름이 가르키는 알 수 없는 것 그 자체(實)입니다.
바로 이 점에 아주 예민하고 날카롭게 집중할 때 깨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중생은 대부분 실제가 아닌 이름만 붙잡고 제 생각 속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즉, 중생은 깨어나질 못한 채 자기 생각과 감각의 환영 속에서 사는 것이지요.
생각하지 않을 때 즉, ‘아무것도 아닌 상태’엔 이름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달이 아니라 손가락이 되니까요. 바로 이 ‘아무것도 아닌 상태’를 스스로 잘
자각(보고 앎으로 하나됨)하고 있다면 점차 밝아지면서 분명해지는데 그게 바로
‘깨어있음’이며 O 자리입니다. 이걸 잘 보고 있을 때 [정견]하고 있다는 겁니다.
정견은 처음엔 내가 하지만 조금 지나면 이미 저절로 잘 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자리는 아무런 인격성도 없는 순수한 생명의 의식 현상이지만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의 내용물이 창조되므로 대부분은 그 속에 붙잡혀 사로잡혀 버립니다.
마치 포충망에 붙잡혀 자유함을 잃어버린 나비 신세와 같다고나 할까요?
뿐만 아니라 생각은 탐진치까지 일으키므로 중생은 그에 결박되어 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물질몸을 영위하려면 생각을 안할 순 없으므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이런
고통과 속박의 삶 속으로 들어갈수 밖에 없지요.
이러한 중생의 번뇌와 업장에서 벗어나는 길은 생각을 하더라도 그 생각이 일어난
원래의 배경자리인 O을 잊거나 놓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중생심과는 분명한
차이를 체험하게 되는데 그건 생각이 작아지거나 멀리 있는듯 보인다는 겁니다.
이걸 생각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겁니다.
즉 깨어나기 전엔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은 즉시 내 눈앞을 100% 다 가려버렸지만
O에 깨어나면(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되므로 저절로 무아가 됨) 마치 텅빈 허공에
파리(잡 생각)나 나비(좋은 생각)가 몇마리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처럼 순간적으로 자기 생각이나 감정에 빠져 붙잡히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 부처라도 이 아무것도 아닌 자리 위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생각입니다.
나도 마찬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들도 다 이름이나 모습으로 잠깐 인식돼 잔상으로
잠시 남아있다간 사라져 버리는 환영들일 뿐입니다. 감각 느낌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정견해보세요. 나와 이 세상은 이렇게 나타나 일정 시간 머물다 사라집니다.
여기엔 그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물질 세상이 본래 없다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따로
있는듯 해도 인간의 의식활동이 일으키는 찰라 현상일 뿐이란 겁니다. 부처님은
이 진실에 연기법이란 이름을 붙여 제행무상, 제법무아에 깨어나라 하신 겁니다.
당신은 매일같이 반복되는 '아무개의 일생'이란 긴긴 장편 드라마를 보고 계십니다.
모든 영화 드라마엔 반드시 희노애락이 있지요? 그래서 당신도 지금 실제는 있지도
않은 환영의 꿈같은 자기 의식 현상 놀이 속에 갇혀 있는 겁니다. 누가 만들었나요?
내(마음이란 분별 육진 활동)가 있으니까 만들어진 것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상태'로 있다면 그런 의식 현상들이 다 내것이
될까요, 아니면 나와 상관없이 그냥 찰라찰나 생멸하는 의식 현상에 불과할까요?
깨달음이란 이런 진실을 정견하고 내 악몽에서 단번에 활짝 깨어나는 것입니다.
내 마음 전체가 다 이런 꿈과 환영의 잔상들이 남아 만든 업(카르마) 덩어리입니다.
우린 본래가 '아무것도 아닌 상태'인 무시무종의 O 자체이건만 어느날 홀연 생겨난
식스존에 갇혀서 이제는 빠져나오겠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잘 보세요. 뭐가 스스로 실재하기나 합니까?
다 당신의 의식 현상 속에서 꿈같이 생멸하는 잔상들의 움직임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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