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수행하고 보림도 합니까? 다 나란 생각이 합니다.
원래 무아라면서 왜 내가 이렇게 아직도 남아 설치고 있는 걸까요?
그것은 아직도 미세하게나마 생각 속에 내(에고)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내가 주도해서 [어디로 어떻게, 어떤 상태나 경지로]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는 한 공부는 평생해도 안 끝납니다. 한 생각은 문제를 만들고 다른
생각은 또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까요. 따라서 이런 구도자의 삶을 끝내려면
과감하게 거꾸로 역발상적인 방법을 취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그것은 지금 내면에서 활동하는 모든 주객과 방법을 다 환영으로 보는 겁니다.
즉 모든 주체와 객체, 방법들이 다 생각이요, 의식의 내용물임을 보는 거지요.
그러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어디로 간다는 이야기가 즉시 사라집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면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뭐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그런 생각 분별에서 훌쩍 벗어나게 됩니다.
있다는 생각이 들어도 오케이고, 없다는 생각이 떠올라도 오케이입니다.
왜냐면 그건 다 생각의 내용물이라 더 이상 따라가 붙잡을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감각 기관에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풍광만이 비쳐지고 들리며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아무런 분별도 없기에 나와 세상의 경계가 사라진 채 의식이
혼연일체로서 한 덩어리가 되는데 이게 살아있는 O이며 십우도의 제 9도입니다.
이 자리에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머물지 않는 중도로서 마음껏 오감을 쓰고
분별을 하더라도 분별 내용의 환영(공)성을 늘 정견하고 있다면 된 것입니다.
이것이 O으로서 사는 거지요. 이렇게 되면 스스로 법성게의 “일중일체 다중일”이
절대 진실로서 체험되게 됩니다. 즉 내가 전체인데 동시에 개체이기도 한 겁니다.
이건 3차원적 시공간 감각으로는 알 수 없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경계지요.
그런데 왜 이렇게 홀연 크게 깨어나질 못하냐면, 자꾸 에고의 나를 만들어 그가
공부도 하고 보림도 한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보림은 O을 본 후엔
더 이상 에고에게 존재의 중심을 내어주지 않는 것 이것 하나 뿐입니다.
내어줬다가 돌아왔다가를 반복하는 한 아직 잠이 덜 깨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깨나려면 일체 다 의식 현상이 만든 환영성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육근, 육경이 만나 생긴 찰나적인 감각에 육진 분별이 잔상 기억을 만든 거지요.
이것은 잔상 효과를 이용해 실상처럼 보이게 하는 영화의 원리와 똑같습니다.
하지만 가능한 중요한 순간에 그 상황을 정확하고 치밀하게 보세요. 그러면 진짜
실상은 감각 기관(육근)에 어떤 자극(육경)이 와 접촉했을 뿐인데, 그에 번개같이
분별 해석(육진 번뇌)이 작용해서 마치 어떤 일이 일어난듯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정견해 봅시다. 예를 들어 당신은 바다에 가서 끝없이 파도치는 움직임에
다 일일이 분별을 일으키며 반응합니까? 아니지요? 분명히 육근과 육경은 만나서
어떤 움직임을 만들지만 당신은 그걸 분별 해석하진 않습니다.
이게 바로 숨겨진 원리입니다. 적어도 당신은 파도에 대해선 해탈한 겁니다.
아마 잔잔한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거려도 그럴걸요? 당신은 그에 반응하진 않아요.
그렇다면 왜 무슨 기준으로 특정한 일들에 대해서만 반응합니까? 일체가 다 의식
현상이건만 '이건 큰일'이라면서 번개같이 개입해서 문제를 만드는 그 놈이 바로
'집 짓는 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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