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남에서 자꾸 공(空)과 무(無)를 말하는 것은 자아를 초기화 하라는 말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를 말하시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불교에서 말하는 O 자리가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임하시는 [성령]입니다.
예수도 거듭남을 묻는 니고데모에게 ‘물(씻음의 정화)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말씀하셨지요. 마음공부에선 자아의 초기화란 나라고 믿었던 모든 걸 전부 되돌아
보는 겁니다. 진짜로 그런 것들이 상존하는 실상의 진짜 나인지 말입니다. 우린
일상속에서 몸과 마음을 다 잊은 무심한 상태로도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심할 때(몸마음의 어떤것도 자기 동일시하지 않을 때), 과연 나의
참 정체는 뭘까요? 그것을 O또는 [자아의 초기화]라고 합니다. 즉 갓난아기 상태로
되돌아 간 거지요. 그러나 그렇게 무기(無記) 상태에 있는 것만이 무심은 아닙니다.
무심은 육식 활동을 다 해도 그것들의 공성(환영성)을 보고 있다면 곧 무심입니다.
무심하게 있어야 비로소 O 자리의 실상을 제대로 보고 듣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뭔가 붙잡고 있거나 머물고 있다면 그것은 뭔 가와 자신을 그 순간에는
순간적으로나마 동일시 하는 것이므로 무심이 아닙니다.
지금 무심하게 그냥 있어보세요. 그래도.....
이렇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들려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저절로 냄새 나고 맛도 알게 되며 느껴지고 있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아무 모습도 없지만 이렇게 분명하게 있지 않습니까?
뭔가가 스스로 살아서 작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것이 당신을 살아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이렇게 저절로 보고 듣고 느껴지는 이 순간이 얼마나 경이롭고 놀랍습니까?
이처럼 자아를 초기화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뭘까요? LIFE is living you, now!
이것을 저절로 살아있음, 생명(life), 법신, 참나, 부처, 하나님 자리라 합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보고(정견), 제대로 하는 공부(정정진)란 항상 초기 상태에서
자아를 쓰는 것입니다. 나아가 늘 초기화 상태로 이미 잘 있음을 확인하는 겁니다.
이것을 내가 하는 공부가 아닌 ‘무심이 스스로 익어가는 공부’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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