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의식을 비꿔서 의식화하려면 먼저 깨나야 하고(O을 봐야하고), 깬 의식으로
자기 몸과 마음을 항상 봐야 합니다. 이것을 현상(몸과 마음)에서 본질(O)로 나란
존재의 중심이 이동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야 비로소 잠재의식이 변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꿈도 변화가 일어나 내용이 점차 바뀌거나 흐려지거나 없어집니다.
물론 이런 과정이 하루 아침에 되는 건 아니지요. 하지만 이런 지켜봄의 정견 과정이
지속돼 습관화 된다면 마음공부는 바른 방향으로 순풍에 돛단듯이 나아갑니다.
이것이 O에 깨어남에서 O과 합체하는 깨달음까지 도달하는 여정의 핵심입니다.
중생은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몸으로 여기는 게 기본 습성입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우리는 그 와중에도 의식이 몸에서 마음(생각, 감정, 감각)으로,
다시 마음에서 몸으로 오락가락하며 번개같이 초점이 이동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저 자기 마음(육식 활동)의 움직임에 정신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닙니다.
한마디로 말해 ‘정신을 못차린 욕망과 망상의 귀신 소굴’ 상태인 겁니다.
흔히 ‘정신 차린다’는 말을 하지만 원래 정신차린다는 말은 자기의 몸과 마음이
지금 무슨 언행을 하는지를 스스로 자각하며 늘 깨어있다는 말입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선 의식의 무게중심(초점)이 늘 자신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견성(見性; 성품을 늘 본다)이라 하며 반대로 자기는 못보고 대상(상)만
따라다니는 것을 견상(見相; 자긴 못보고 상만 본다)이라 합니다. 견상만 한다면
그는 아직 생각, 감정, 감각 느낌의 노예로서만 살며 윤회는 예약해 놓은 겁니다.
불교가 그토록 시비분별에서 벗어남을 거듭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중생심은 자기 에고(자존심)를 보호하려고 쉽게 분노하고 미워하며 싸우려 합니다.
하지만 공부가 잘된 이일수록 하심(下心)하는 자세로 살며 시비분별을 멀리 합니다.
세상에선 옳고 그름을 잘 따지는 이를 현명하다고 하지만 출세간의 세상에서는
정반대입니다. 그럴수록 ‘깸이 몸과 마음을 봄’이 아니고 거꾸로 ‘생각(마음)이
다른 생각과 감정을 대하며 흥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깸은 어디론가 홀연 사라져
버린 채 정신은 가출하고 육식만이 날뛰고있는 무법 지대가 되고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공부하는 이는 남의 언행이 아닌 ‘자기를 봐야’ 합니다.
부처님은 “세상에 휩쓸려 가지 말고 자기를 섬으로 삼아 귀의하라.” 하셨습니다.
강물이 아무리 세차게 흘러도 섬은 따라가지 않은 채 홀로 우뚝합니다. 섬처럼
되시려면 빨리 O에 깨어나 그 ’깸이 몸과 마음을 보는’ 생활을 지속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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