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우는 아침명상
-
[찰라 생 찰라 멸] 밖에 없다(2026.07.21.) 응무소주 이생기심(어디에도 머뭄없이 마음을 내라)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중생심은 또 ‘내가 이렇게 해야 된다’며 방법을 생각합니다.
즉 언제 어디서든 자기의 판단 분별과 지견을 내려놓지 못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바른 뜻은 “모든 상(相)들은 ‘찰라 생 찰라 멸’하는 육식 활동에 불과하니
일체를 다 환영(공)으로 보면 늘 아무일 도 없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즉 이 말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게 아니라 세상의 실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본래 환(幻)이라 붙들어 머물거나 어쩌고 할 게 일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내 눈에 순간적으로 맺히는 상(相 이미지)들의 연속일 뿐인데 우리는 그걸
영화의 원리처럼 누가(뭔가) 있어서 그게 주체로서 활동한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잘 보면 모든 건 다 “내가 이렇게 보고 어떻다고 여기는 것”(해석)에 불과합니다.
사실(fact)은 그냥 찰라찰라 뭔가 상(相)으로 인식되며 나타나고 동시에 찰라찰라
그 뭔가라는 상(相)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그 자체로 계속 머물지 않으며
조금씩이라도 자꾸만 변화하는 가운데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실상이 이렇기에
그걸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 수단들도 똑같이 그렇게 계속 생멸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중생은 그 안에 자기의 분별 해석을 번개같이 개입시켜 ‘누가 무엇을 어떻게’
라는 이야기 세계를 만들어 내고 그 안에 들어앉는 겁니다. 물론 그런 작업을 일체
하지말라는 건 아닙니다. 세상은 이미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따라 알더라도 그에 머물고 붙들며 그 해석을 실체화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는 실상이 아닌 우리들 해석이고 분별이니까요. 실상은 단지 ‘모든 게
찰라 생 찰라 멸 하면서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 하나 뿐입니다. 이러한 진실을
흔들림 없이 끝까지 보면서, 이야기에 따라 적절하게 마음을 내고 대처할 뿐 입니다.
그러나 뭐가 실상이고 뭐가 허상(생각이 해석 분별해서 만든 이야기 스토리)인지는
스스로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삶이란 이 거대한 이야기
(생각의 피조물 세계)로부터 해탈(解脫)하게 됩니다.
이렇게 실상을 보는 안목이 열리게 되면, 그에겐 세상 모든 일이 다 있긴 하지만
동시에 아무 일 없이 다만 투명하고 순수한 의식만이 살아움직이는 찰라들만이
눈앞에서 활발발하게 일체의 상(相)들을 비추며 '찰라 생, 찰라 멸'하는 춤을 춥니다.
실상은 이러하건만 마음속 생각은 나도 만들고 내 삶도 만들어서 긴긴 꿈을 꿉니다.
전체 184 건 페이지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