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있는 그대로’ 본다면 그냥 순수한 움직임일 뿐입니다.
하지만 내 생각 속 눈길로 본다면 무수한 분별 속에서 다양한 문제가 생겨납니다.
달마 혈맥론은 이 사실을 지적하며 ‘생각만 없으면 있는 그대로가 모두 진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눈과 잣대로만 보면 항상 너는 이래서 문제고 그는 저래서 문제입니다.
이것은 내 생명의식의 순수한 빛에 개인적 분별의 필름이 씌워졌다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관의 원리와 같이 그 이후엔 끝나지 않는 내 이야기가 계속되지요.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런 삶이 우리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느냐?’ 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분별은 다 내가 살아온 정신적 수준과 경향에 따라 만들어진
것들이므로 주관적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나와 내 것]이란 내 마음이
만들어지면서 삶은 그 그림자 속에 갇히고 고만한 한계를 갖게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살면서 사실 아무런 분별도 안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색즉시공관 점에서는 분별을 하더라도 그걸 공하게 보라는 것이고,
공즉시색 관점에선 하나님, 부처님 눈길로 한번 다시 보라는 말도 있는 겁니다.
하나님, 부처님 눈은 부정적 비판과 분별이 앞서지 않고, 사랑과 자비심으로
충만한 가운데 보시기에 무한히 용서하실 수 있으며, 문제를 보더라도 그렇게
‘흔들리면서 성장하고 자라나는 꽃피어남’의 과정으로 보신다는 거지요. 물론
비판하고 꾸짖을 수도 있지만 그 배경엔 늘 사랑과 배려가 같이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눈은 어느 정도 색즉시공까진 갈지 몰라도 그런 공즉시색의
눈까지는 못 가기에 자꾸 스스로 괴로움과 갈등을 만듭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라는 ‘영적 에너지’의 크기 문제입니다.
영적 에너지가 커지려면 세상을 자기 생각이 개입하지 않은 가운데 늘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세상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우며 순수한 광휘 속에 사랑으로 충만한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안목 자체가 바로 생명이 가진 본래적 특성이니까요.
그리고 이게 바로 하나님, 부처님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어떤 시에도 “자세히 보면 볼수록 더 예쁘다”란 말이 있습니다.
힐끗 보는 개미와 자세히 살펴보는 개미는 존재의 경이로움부터 크게 다릅니다.
저 조그만 몸에 어쩌면 그렇게도 많은 지혜와 능력이 숨겨져 있는 걸까요?
개미 한 마리도 이런데 길가의 가로수나 그 밑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서 볼수록 '있는그대로'의 세상은 더 경이롭고 아름다우며
신비하기조차 합니다. 그런 안목에서 생명을 사랑하는 정신과 에너지가 솟아나며
우리가 서서히 변하고 거듭나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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