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에선 “눈앞의 소식”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
눈앞의 소식이란 이미 눈앞에 훤하게 다 진리가 드러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중생의 눈(육안)만 가졌다면 이게 보이질 않는 거지요.
눈앞에 살아있는 진리를 보려면(알려면) 아래의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즉 ‘일체 눈앞의 것은 다 내게 인식된 것이지 내가 아니다’란 것입니다.
삶을 잘 보면 모든 생각, 감정, 감각 느낌은 다 눈앞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이렇게 자꾸 변하는 것은 본질(실상)이 아닌 현상(환영)일 뿐이란 말입니다.
즉 인식되는 건 자꾸 변하고 바뀌니 변치않는 본질(불성)은 아니란 겁니다.
반면에 인식하는 것(아직 뭔지 모르니 생각 이름을 쉽사리 붙이지 말고)은 늘
변치 않습니다. 어려서나 지금까지 삶을 인식하는 것은 항상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본질(진리, 실상)이겠습니까? 변치않고 인식하는 것이죠.
깨어난다는 것은 이것이 진정한 나 자신이고 보이는 모든 것들(오온; 몸, 생각,
감각, 의도, 분별)은 모두 일시적 환영(생명 현상)임을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반야(지혜)가 어려운 말이 아니라 바로 이걸 가르키는 것일 뿐입니다.
즉 “움직이고 변하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을 헷갈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게 뭐가 어렵습니까? 그런데도 깨어남 공부가 어렵다고 푸념한다면 그는
정신적으로 너무나 게으르고 미련한 사람일 뿐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은 바로 이 말이기도 합니다.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을 항상 헷갈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본다.”
이게 어려운가요? 삶의 어지러운 현상에 술마신 자처럼 도취해서 깨어나지
못한 채 잘 안된다고 불평하는 이유는 그저 정신 집중을 안하기 때문입니다.
정신 집중해서 며칠만 계속 해본다면 누구나 다 깨어날 수 있습니다.
깨어남에서 내친 김에 깨달음까지 나아가려면 여기서 하나만 더 살펴보면 됩니다.
그것은 '오온을 나타냈다가 사라지게하는 것도 변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거까지 눈치채고 ‘눈앞의 소식’ 안에서 완벽하게 변하는 것과 변치않는 것을
가려서 본다면 그 눈을 [진리(본질)를 보는 혜안(법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그의 눈은 생각 이전의 '살아있는 의식'(이것도 생각이 붙인 이름임에
주의)의 움직임을 항상 놓치지 않게 됩니다. 이걸 ‘깨달음’이라 하지요.
하나님을 본다는 것도 바로 이렇게 진실을 보는 눈을 떴을 때를 말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다 자기의 주관적, 반복적 생각 속에서 실상을 보지 못한 채 그저
추측, 상상만 하면서 눈감은 소경처럼 하나님을 찾는 겁니다. 지금 많은 기독교인이
명상과 깨어남을 찾는 이유가 생각과 느낌 속에선 안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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