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깨달음이란 생각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야 제대로 달성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어중간하게 대충 벗어나선 순도 100 %의 완전한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어중간하게 벗어나면 아는 단계에 머무는 것일 뿐 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삶은 경험함, 생각함, 그리고 모든 것을 지켜봄(앎)의 3 가지로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몸을 경험함으로부터 시작해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생각을 거쳐, 지켜보고
각성해서 점차 깨어나는 과정으로 성장합니다. 물론 중간 단계인 생각하는 수준에
머무르며 좋다, 싫다, 맞다, 틀린다를 다투다 끝나는 인생이 훨씬 더 많긴 하지요.
선하고 좋은 생각을 많이 한다고 생각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왜 생각을 ‘에고의 무기이자 권세’라고 까지 말할까요?
그 이유는 생각은 살아있는 것을 죽은 관념 속에서 규정해 고정시키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살아있는 동식물을 박제로 만들거나 말려서 보관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은 결코 실상을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 100 %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지금 세상과 자기 삶조차 전부 다 생각으로 오염시켜서 몽땅 다
죽이거나 말려 놓고 그 이름과 형상만 중요시할 뿐 보이지 않는 부분의 가치까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고통받으며 온갖 걱정 근심 속에서 사는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즉 우리는 이제 너무 생각에 중독되어 생각의 큰 특징인 흑백 상대 논리 구조 속에
갇혀서 살아가는데 익숙해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A란 일이 생기면 반드시 B라고 이름붙이고 C로 해석합니다.
이러면 삶이 진부해지고 뻔하게 되지요. 그래서 자기 삶이 회색으로 물들게 되고
모든 것에서 신선한 흥미를 잃는 겁니다. 모든 것엔 다 이미 이름과 효용 가치가
매겨져서 꼬리표처럼 달려있으니까요. 어릴 때의 그 경이롭던 세상은 사라졌습니다.
이건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마주하며 사는 태도가 아니지요.
이건 생각이 주로 재단하고 규정하는 주관 추상적인 개인의 마음 세계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대자연에 사는 생명체가 누굴 계속 미워하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 근심에
스트레스를 받다가 병을 얻었다는 얘길 들어보셨습니까?
아니지요. 오직 인간만이 제 생각이 만든 병 속에서 고통받으며 삽니다. 대승 불교가
소승에 비해 더 진보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승의 초 선부터 4 선까지나
그 이후 ‘구차제정(九次第定)’이 모두 다 생각에서 벗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대승 불교는 즉각 직지인심의 방편 법을 통해 생각 이전 O자리를 가리킵니다.
물론 워낙 크게 건너뛰는 게 많다 보니 중간에 있는 함정에 많이들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업을 전폐하고 전업 수행을 해야하는 소승에 비하면 대승이야말로 현대
공부인들에게 생명의 동아줄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대승 불교에도 단점은 있습니다. 워낙 크고 멀리 건너뛰다 보니 중간에
미세하게 자기 생각이 진을 치고 있는 미세 번뇌를 무시하거나 없는 걸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은 그걸 정견해서 사라지게 하기 전까진 반드시 어딘가 숨어
있다가 꼭 결정적인 경우에 그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보림이 필요한 거지요.
그러므로 현대 선을 공부한다 하더라도 '봄과 앎(알아차림)'의 정견은 항상 밀밀하게
이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O을 체험하게 되고 나중엔
O이 온 세상과 우주 일체를 다 흡수하고 삼켜버리게 됩니다.
이걸 멸진정(열반)이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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