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법신자리를 보려면 그걸 보는 내면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걸 그냥 육안으로 본다고 보여지는 게 아니라서 아주 집중해서 봐야 합니다.
이걸 보게 되는 것을 ‘깨어난다’하며 그걸 보는 눈을 법안이라 하는 겁니다.
외국 사람이 뭐라 하면 우리는 말소리만 듣지 그 내용을 모릅니다.
마치 새가 울어도 우린 소리만 들을 뿐 그 의도나 내용을 전혀 모릅니다.
만약 이걸 거꾸로 내용만 듣고 소리를 안 듣거나 무시할 수가 있을까요?
안되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들이 바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이 말하면 그 내용만 듣지 그 소리를 왜 내는지를 듣지 않고 안 봅니다.
자녀가 학교 가기 싫다는 말을 하면 부모는 그 내용만 듣고 ‘안 돼!’ 반응할 뿐이지
자녀가 왜 그런 소리를 반복해서 내는지는 까맣게 모릅니다. 그 이유가 뭔지를
아십니까? 그 이유는 다른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나중에 후회하며 웁니다.
이처럼 우리는 누가 말을 해도 그 말의 내용에 대한 내 생각을 볼 뿐입니다.
우리는 선생이 뭘 가르쳐줘도 그에 대한 내 생각대로만 대응할 뿐 더 깊이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내 방식을 바꿔야 삶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생명법신의 자리를 보려면 더 깊이 가장 본질적인 것을 봐야 합니다.
모든 언행에는 그 내용뜻보다 더 깊은 본질적인 것이 항상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뭔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기능작용이란 것입니다.
동식물의 세밀한 움직임도 깨어서 보면 그 생명의 움직임과 표현을 볼 수 있지요.
모든 순간들 속에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움직임 속에 있는 은밀한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손을 흔든다고 만 보지, 손을 흔드는 힘이 같이 있음은 못 봅니다.
우리는 생각을 한다고만 하지, 생각을 움직이는 힘이 같이 있음은 못 봅니다.
우리는 감정을 느낀다고만 하지, 감정을 움직이는 힘이같이 있음은 못 봅니다.
우리는 느낀다고만 하지, 느끼게 하는 힘이 있는 건 못 봅니다.
우리는 노래한다고만 하지, 음율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건 못 봅니다.
우리는 뭐가 움직인다고만 하지, 일체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는 건 못 봅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만 하지, 날 움직이게하는 힘이 여기에 같이 있는건 못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는데 왜 당신도 따라서 웁니까?
무언가 알지 못할 힘이 당신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고 그 때문에 울지 않나요?
바로 이힘을 알아보는게 ‘깨어남’이며 견성(見性)하는 겁니다.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보느냐고요? 왜 사랑하는 자녀가 고통 속에 흐느낄 때
당신도 똑같이 울게됩니까? 이렇게 엄연히 있는 걸 왜 안 보인다고 없다고 합니까?
그래서 자세하게 잘 보라는 겁니다. 그럴 때 바로 ‘이것’에 대해 감을 잡게 됩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 자신도 무아(無我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린 자신이 무아로 제로(0) 상태가 되었을 때만, 비로소 드러나 체험되는
이 경이롭고 은밀한 힘을 제대로 보지 못하며 체험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어디 이걸 한번 봐야지’하는 의도가 있으면 그것 때문에 안보입니다.
‘아마 이렇고 저렇게 생긴 걸 거야’하는 규정이 먼저 있어도 안보입니다.
이것은 상대가 아닌 절대적인 실재이므로, 내가 대상으로 삼아서 보려고 하는 한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문득 없어지는 찰나에, 이것은 그대신 순간에 드러납니다.
내 선입견과 생각의 조작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보라는 말도 그 때문에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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