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우는 아침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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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과 저것 사이의 거리(2026.06.07.) 이것과 저것 사이엔 여러가지 다름이 있기 때문에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다르다는 판단은 다 우리들 각자의 생각이 만든 분별이지요.
생각의 내용에 빠지지 않는다면, 즉 의식 그 자체의 순수한 활동이 있다는 사실만
본다면 둘 다 똑같습니다. 왜냐면 둘 다 의식(생각; 제 6 식)의 활동이니까요.
깨어남이란 별다른 게 아니며 어디에 특별한 게 따로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즉 각양각색인 이 세상 모든 것들의 공통점을 보는 것입니다. 핸드폰으로 우리는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며 때로는 글도 쓰고 친구와 대화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다양한 핸드폰의 기능(작용)은 단지 전기력에 의지해 가능합니다.
즉 전기력 하나가 모든 다양한 핸드폰의 기능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육식 활동도 단 하나(생명력이 투사한 의식)만에 의지해 모두 가능합니다.
즉 다양한 기능 작용의 본질(가능한 원인)을 본다면 그건 다 하나란 겁니다.
물론 이것과 저것 사이의 거리는 우리가 그 내용에 빠져들면 멀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만들고 있게 하는 본질을 본다면 모든 게 다 하나로 귀결됩니다.
즉 생명이 순수한 의식을 통해 다양한 기능과 작용으로 나타났을 뿐인 겁니다.
내용(생각)에 빠진 걸 대승기신론은 생멸문이라 하며 안빠지면 진여문이라 합니다.
안빠지면 일체가 다 하나인데 빠지면 천차 만별로 다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대다수 사람들은 항상 이것과 저것 중에 어느 한 편에 속해서 삽니다. 하지만 깨어나게
되면 내용(생각)에 안빠진 상태에서 빠진 상태의 경험도 같이 할 수 있게 됩니다.이걸
중도(中道)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중도는 양 다리를 걸친 채 묘한 균형을 잡은 상태
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그런 상태에선 이것과 저것 사이의 거리는 없지만 있고, 있지만
없습니다.
보통사람은 자기 생각과 자신을 자기 동일시하므로 내 생각과 다르면 미워하거나
저항하지만 깨어난 이는 모든 생각과 그 본질인 생명의식 자리를 동시에 같이 보므로
어떤 생각이 불러오는 후폭풍(감정의 대립과 불편함)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이것을
어려운 문자로 해탈(解脫)이라고 하는 것 뿐입니다.
즉 더 이상 이것과 저것의 다름이 내게 문제가 안되는 것입니다. 뭐든 더 이상 알려고 들지
않으며 몰라도 그냥 평안해집니다. 왜냐하면 알아도 이것(의식)이고 몰라도 이것(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앎과 모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모든 앎을 초월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지금 내 삶에 이것과 저것이 생겨나서 서로 대립한다면 나는 괴로워집니다.
하지만 그 거리가 실재하는 게 아니라 다만 내 생각 속에만 있는 환영임을 본다면 더 이상
나는 그 거리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몸과 마음을 보며
모든 것들과의 거리를 없애갈 때 그에게 불이법(不二法)이 체험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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