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우는 아침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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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일과 생각 아닌 일(3)(2026.06.05.) 생각의 일이 생멸문(차안)이면 생각 아닌 일은 진여문(피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진리는 어디까지나 불이법(不二法)이지요.
그러므로 생각의 일과 생각 아닌 일은 본래 따로 있는 게 아니어야 합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깨달으면 차안과 피안이 만나고, 생각과 생각 아닌 일이 다시
둘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아직 공부인에겐 그저 말일 뿐 자기 현실이
되지 않는 한 그저 주어들은 얘기요, 꿈에나 그리는 경지입니다. 왜냐면 그리되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본인이 아직 제대로 경험해보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합]에 도달하기위해선 [정]과 [반]의 과정을 거쳐야 함과 같으며,
산이 거듭난 산으로 보이기 위해선 중간에 한번은 [산이 그 산이 아닌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결과로 [다시 산은 산이다]가 되는 거지요.
그럴 때 우리는 양변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로서 깨어나게 됩니다.
이건 그 이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체험말고는 달리 설명이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말해본다면 양변에 치우치지 않는 중간의 경지가 따로 있다는 게 아니라
전체(무한)가 열려서 양변을 다 자각 인식하면서도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과
유사합니다. 즉 이것은 어디에나 다 존재할 수 있는 신불의 차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해도 동시에 생각 안한 것과 같으며(생각의 일이 생각 아닌 일이며),
분별을 해도 분별하지 않은 것과 같다(번뇌즉 보리)'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자기가 실제 그런 경지가
되지 않으면 결코 체험할 수도,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걸 바로 반야심경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표현할 뿐입니다.
지금 저는 여러분을 이렇게 안내하고 체험하도록 하려고 안내하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최종 목적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보다는 ‘어떻게?’를 설명해야 겠지요.
생각으로만 재빠르게 규정하고 이해 정리해서 공부하는 성 질급한(?) 분은
이 글을 접하고는 또 생각으로 '그러니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거 아니냐?'
같은 분별을 할 것입니다. 그런 규정하기 좋아하는 업습때문에 그에겐 진여문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도로 생각 속으로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대승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은 '응무소주 이생기심(어디에도 머무르지 말며 다만
자유로히 마음을 쓰라)'입니다. 즉 어디에도 머물지 말아야 비로소 본래 면목(O)이
제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며, 그럴려면 자기가 지금 좋다고 머무르는 생각이나
체험, 느낌에도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붙잡고 머무는 순간 그 경지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계속되게 이런 태도와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양변이란 분별(인간이 가진 모든 육식 활동의 내용물)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를 위하여 지금 여러분들은 이쪽 끝과 저쪽 끝을 가볼 수
있는 데까지 한껏(끝장을 본다는 심정으로) 가보셔야 합니다. 안그러면 또 무언가
붙잡고는 좋다고 붙잡고(?) 중간 어딘가에 앉아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법을 끝까지 붙잡고 머물지 않을 때 비로소 생각의 일과 생각 아닌 일을 동시에
넘어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 둘 모두가 내가 붙잡고 머물 때에는 또다시 생각의
일이 되며 아상과 법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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