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스스로 절대적일 뿐 이것에 대칭되는 저것의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죽음에 반대되는 몸 동작(춤) 같은 걸 '살아 있음'이라고 여긴다면 그건 아직
생각 속 분별일 뿐입니다. 춤 선생이라 할지라도 성품을 모른다면 아무리 춤을 많이
잘 춘다고 해도 그는 정신적으론 이미 까맣게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도인이 춤을 춘다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중생이 춤을 춘다해서
그가 법신 자리를 깨쳤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지 선사가 엄지를
치켜드는 흉내를 냈던 동자승의 손가락을 베어버린 이유입니다.
즉 가짜로 다 된 척 다 아는 척 흉내내지 말라는 엄중한 가르침인 거지요.
'살아 있음'의 흔적이라도 제대로 보려면 대자연의 움직임을 아주 세밀하게 동시에
매우 거시적인 안목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생명은 동물로 나타나지만 그 동물이
죽으면 그 몸과 분리되어 다른 같은 종류의 동물을 다시 출생시킵니다. 그러므로
동물의 몸은 죽지만 그의 마음과 생명은 여전히 하나로 살아 있는 겁니다.
길거리에 늘어선 가로수나 조그만 풀 한 포기조차에도 전 우주를 나타내고 움직이는
이 생명력은 '살아 있음'으로 나타납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죽었다 여기는 돌멩이도
그 분자들 사이에서는 서로 사랑과 합체심으로 끌어당기는 인력이 있기에 그런
형체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모습들은 이미 다 사랑의 화신인 겁니다.
그러니 사실은 온 우주에 살아있지 않은 게 없습니다. 우린 움직이지 않으면
죽었다 여기지만 그건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우주는 통째로 하나의 대생명으로
지금 여기 살아 있음을 보셔야 합니다. 그게 부처를 보는 겁니다.
'죽음조차 삶의 일부'란 바로 이 말입니다.
즉 인간만이 자기 몸을 기준으로 해서 유정물,무정물을 구분하고 몸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면 죽었다고 분별하는 것이나 사실은 몸(형체)은 옷과 같은 것이라서
그 스스로가 살아있는 건 아닙니다. 모든 걸 살아 있게하는 것은 결국 몸의 움직임이
아닌 우주 대생명의 움직임인 거지요.
모든 모습들은 우주에 충만한 양자들이 영원히 살아 움직이며 이런저런 조합으로
일시적인 모습을 만들어내는 창조 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전들은 자꾸
보이는 일시적 모습에 속지말고 그것에 깃들어 그를 움직이고 유지하며 살려주는
보이지 않는 ‘살아 있음’이란 섭리이자 힘이며 정신이자 알 수 없는 이것에 주목하란
겁니다. 이것은 불가사량하고 무한 자체라 인간의 생각으론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실상을 ‘춤출 수 있는 힘’이란 생각으로 규정하고 생명이다 생각한다면
그건 분별 망상이고 생각 속에 여전히 빠져서 도를 하고 있는 거라서 깨어난 게
절대 아닙니다. 진리는 생각 ‘정보’가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나를 살려주며
글을 읽고 생각을 쓰면서도 알 수 없다 여기는 바로 이’움직임(파동)’입니다.
부디 이것을 그 무어라고 규정하려 하지 마세요. 규정하는 순간 이것은 죽습니다.
그래서 죽은 관념 생각의 세계 속에 갇혀버리는 겁니다. 당신은 지금 살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 세계 속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반쯤은
죽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나려면 자기 생각을 보고 또 봐서 벗어나란 겁니다.
한 생각만 탁 놓으면 이자리는 바로 드러납니다. 이미 여기에 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그 간단한 것을 못해서 여전히 모른다고 헤매는 겁니다.
이걸 보려면 지금 생각하고 있음을 스스로 아는 그 '살아 있음'을 눈치채세요.
이미 온 누리에 '이것'이 충만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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