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언어)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일 뿐 달 그 자체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걸 의지해서 공부해야하므로 생각을 쓴다면 매우 정밀해야합니다.
마치 0.01 미리를 가르키는 바늘 끝처럼 예리해야지 몽둥이처럼 뭉툭해서 1 센티
조차 가르키지 못하는 우를 범해선 안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앎과 알아차림은 아주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알아차림]에는 행위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즉 누가 무얼 알아차린다는 주체와 유위 행위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마음공부에서의 [앎]은 그런 행위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영어로는 [know]지만 깨어남의 [앎]은 영원한 현재 진행형(knowing)인 것입니다.
그러니 주체도 없고 무위행입니다. 영어 문법적으론 상태 동사인 know에 [~ing]가
붙는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하지만 영성공부에서의 [앎]은 그렇게 표시되어야
본래의 실상에 더 가깝습니다.
즉 [앎]은 이미 존재하는 실재로서 주체도 행위도 아닌 그 이전의 것입니다.
‘지금부터 내가 본성을 알아 보겠다’는 생각 이전에도 이 [앎]은 모든 생명의 당연한
기능으로서 자연스럽게 존재해 왔습니다. 당신이 이 [앎]을 자각하기 이전에도 앎은
스스로 존재했습니다. 그러니 [앎]에는 주체도 행위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체가 이 [앎] 안에서 문득 문득 자각 인식됩니다.
우리는 나를 자각 인식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이 앎의 기능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야말로 무시 무종인 것입니다. 따라서 [알아차림]을 갖고 [앎]과
동일하게 생각했다면 그는 아직 진짜 이것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게다가 알아차림이란 유위행을 자각 인식하려면 생각이 개입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인식했다’라는 유위 행위란 과정이 진행된다는 것은 곧 시간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3 차원 식스존에서 아직 못 벗어났다는 겁니다.
물론 위빠사나 공부에선 먼저 [알아차림]을 갖고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앎]을
그대로 거론한다면 사람들이 그걸 즉각 체험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일시적으로 끝나는 [알아차림]을 연습해서 영속적인 [앎]에 눈뜨는 겁니다. 따라서
알아차림의 수준에 머물지 말고 그 조차 아는 [앎]자체로 깨어나야 하는 겁니다.
결국 마음공부란 이처럼 자기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에 의지하여 공부하지 마세요. 진실을 보는 자기 마음의 눈을 뜨는
연습을 줄기차게 거듭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나인 [앎]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