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깨어나는 이 공부는 모든 종교 이전의 참 종교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자기 문제를 갖고 절대자 앞에 나와 해결을 원하거나 또는
위로받으려는 것이지만 이 공부는 모든 문제가 있는데 다 없게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마음이 인간 마음을 초월해 본래의 압도적인 절대 생명과 합체하다 보니
자기의 마음이 만든 모든 문제와 걱정과 근심들이 다 환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환상처럼 보여지는 게 아닙니다. 진짜로 환영이 되어 텅빈 허공 속 먼지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실제로 깨달은 사람만이 갖는 엄청난 체험입니다.
글자 그대로 삶이 가진 모든 고통과 문제가 있는 그대로인데도 불구하고 정말로
이자리에서 살아있는 채 해탈 열반하는 것입니다. 만약 O 자리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게 안된다거나 아직 100 % 그렇게 되진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 정견력이 부족한
것이며 분별심이 아직도 남아서 조금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겁니다. 마치 빨래를 했건만
좀 덜 세탁되어 때가 약간 남아있는 상태와 같지요.
그래서 그런 분은 좀 더 존재의 중심이 O으로 완전하게 이동해야 합니다.
존재의 중심이 이동한다는 것은 모든 오온(육식) 활동이 모두 다 생명이 투사한
순수하고도 투명한 의식의 움직임에 불과하다는 실상을 명백하게 보는겁니다.
즉 바다에 아무리 다양한 파도가 심해도 그건 결국 다 물일 뿐임을 봐야 합니다.
대승기신론에 생멸문과 진여문이란 비유가 나옵니다.
인간의 육식 활동 현상은 다 생멸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그것의 본질을 늘
정견하는 안목을 가진이는 설사 큰 일이 있더라도 아무 일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이는 정견을 통해 자기 일상을 진여문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1 %에 해당하는 육식 활동의 내용이 아닌 99 %에 해당하는 생명 자체를
늘 정견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육식활동이 다 환영처럼 보여지면서
그것이 그리 강하게 과거 나를 괴롭혔던 것은 단지 내가 그렇게 무겁게 붙잡고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란 진실에 깨어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1 %마저도 더
정견하면 내가 붙잡고 그게 실제로 있다고 생각한 분별에 불과함을 보게됩니다.
부처님께서 설하는 중도의 삶이란 일단 이렇게 모든 고통과 번뇌에서 해탈한 후
그 여여한 평화와 기쁨 속의 삶에서 현실을 돌보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해탈 이후의 삶은 모든 문제가 여전히 그대로 있지만 신기하게도 정말로 없습니다.
일반적인 사고 논리론 있다, 없다가 동시에 있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불가사의한 일이 누구나 깨달으면 실제로 분명히 일어납니다. 즉 생멸문에 빠져들면
있게되고 진여문에 안주하면 없게되는 겁니다. 하지만 깨달으면 그 어느쪽도 아닌
일원론적인 중도라서 내 마음대로 양쪽이 동시에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멸문 자체가 이미 진여문 속에 일어난 환영 거품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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