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모든 고통과 번뇌는 다 생각에 의존하여 존재화 됩니다.
‘내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한다’든가 ‘너는 이래야 하는데 왜 안 그러냐’ 등은
모두 다 생각 속의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장난 때문에 우리 삶은 평안할 날이
없지요. 탐진치 역시 모두 생각 속에서만 일어납니다. 왜냐면 모든 탐진치도 일체가
다 굵거나 미세한 분별 속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며 깨달아야겠다는 것도 생각 속의 일(장난)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면 할수록 생각의 지배에서 못 벗어나므로 못 깨닫습니다.
하지만 ‘추구하지 말아야지’도 생각이며 ‘어쩌란 말이야?’ 역시도 생각입니다.
그래서 공부는 열심히나 게으르게도 하지 말고 단지 은근하게 꾸준히 해야 합니다.
생각으로만 빨리 이해하거나 기억 저장하려는 한 깨어남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왜냐면 생각은 첫번째자리(실상)가 아니라 항상 그에 대한 단어의 개념화 작업이라
두번째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첫번째자리의 일을 심안(법안)으로 직관 자각할 때 이를 ‘깨어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깨어남이 일상화될 때, 즉 일상이 ‘깨어남의 빛 모드(twinkling mode)’속에
있을 때를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삶이 가볍고 빛나며 평안해지는 겁니다.
생각 아닌 일이란 바로 이걸(생명에 깨어남의 반짝 모드) 말합니다.
깨달음이 분명해지면 생각이 있어도 그 생각에 전혀 영향 받지 않기 때문에 없는
상태와 같아집니다. 이는 생각이 공하게 보이기 때문이지요. 감정이나 느낌도
'생각 아닌 일'이지만 깨어나기 전보다는 너무나 새롭고 생생하게 됩니다.
즉 깨나기 전에는 슬프고 힘든 감정이 생기면 그에 삼켜져 지배당하기 때문에
그 감정이나 느낌과 100 % 자기 동일시 되어버리지만, 분명하게 깨어난 이후엔
그런 감정이 생겨도(통증도 마찬가지) 다만 생생한 체험만 있을 뿐 이상하게도
그 감정,느낌과 100 % 자기 동일시 되거나 함몰되어 지배당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슬프지만 슬프지 않다, 힘들지만 평화롭다는 말도 가능해지는 겁니다.
그 이유는 ‘깨어남의 빛 모드(twinkling mode)’가 바로 자기의 실상이자 본질임에
항상 깨어있기 때문입니다. 즉 1~ 8 식인 생명의식의 기능 활동과 9 식이 같이
섞여서 혼동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구름과 맑은 하늘이 반반씩 있는 상태 같다고 할까요.
마치 맑은 하늘의 자리에서 햇빛이 비추는 다양한 구름을 지켜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생각 아닌 일’이 굉장히 도달하기 어려운 높은 곳에 있는 건 아닙니다.
중생심이 쉬어질 때나 무심히 지낼 때는 언제든지 생각 아닌 상태가 드러나서
마음이 쉬어지고 평안하며 1~ 8 식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법안이 아직
떠지지 않아 법안(9 식의 봄+ 앎의 힘)이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의하실 점은 깨어났다고 탐진치가 다 일시에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은 사람조차도 어느 정도의 탐진치는 갖고 살아갑니다. 다만 중생과 다른 점은
그 탐진치의 정체를 스스로 여실하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걸 못 본다면
아직 점수(보림)가 덜 된 것입니다. 깨어있다면 무의식이 계속 정화됩니다.
그래서 깨달아도 100 % 순수한 생명 법신의 빛과 힘(에너지)이 드러나도록 계속
정진해야합니다. 하지만 이 공부는 자기가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법신이 한다),
'공부를 깨달아 마쳤다'는 말도 (개인 아무개 입장에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과나무가 물을 빨아 올리고 영양을 공급해서 꽃을 피우고 사과 열매를 점점
더 크게 할 순 있어도 그 열매에 향과 맛, 붉은 색깔을 주는 것은 자연 전체가 하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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