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리를 잠깐 슬쩍 보는 게 아니라 거의 항상 보게 되었다면 법을 봤다고 합니다.
잠깐 슬쩍만 본 사람은 아직 자기 생각에 많이 휘둘리고 그 내용에 빠져들므로
아직 법을 제대로 봤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법을 본다고 해서 그에게 모든 역경계가 당장 다 사라진 건 아니지요
법을 봐도 역경계는 여전히 힘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역경계의 내용물(생각, 감정, 느낌 등)이 점차적으로 공(空)하게 보인다는 점입니다.
공하게 보인다는 것은 '스스로 실재하지 않는 환상'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스스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에게 의지하여(나타나)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비유하자면 개 한마리를 갑자기 만났는데 어떻게 대응하냐는 사실상 내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도망가다 물리느냐, 눈을 부릅뜨고 도망가게 하느냐인 거지요.
어렸을 때 아끼는 장난감을 남이 가져간다는 것은 대단한 역경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러합니까? 지금은 아주 가볍게 웃으며 넘겨줄 수 있습니다.
번뇌가 스승이란 말은 모든 번뇌와 장난감이 본질상 육식 활동의 내용물이란
점에서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큰 문제로)무섭게 분별하는 내 마음(육식)을
따라 가는 지금의 상태에서, 벗어나 지속적인 정견함을 통해 깨어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도 훗날엔 별 게 아니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모든 건 다 내 마음(육식 활동)의 장난이니까요. 즉 역경계의 육식 활동에 그냥
속절없이 당하지 말고 ‘내가 본래 무아인데 왜 요만한 일로 지금 괴롭단 말인가’
하고 자기의 마음이 일으키는 장난을 지켜보고 즉각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기가
있다, 이건 힘든 거다 하며 먼저 믿으니까 다 일어나는 마음의 장난아닌가요?
그렇게 알아차리면 점차적으로 괴로움이 약해지거나 사라집니다.
처음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되풀이하면 점점 빨라지고, 숙달되면 나중엔
즉각적으로 괴로운 마음(생각, 감정)이 사라지는데 이게 바로 법력(法力)입니다.
법력이라고 하면 큰 신통력을 말하는 거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자기 마음의
장난질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모든 고통 번뇌에서 해탈하는 것이라 최상의 삶을
살게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역경계를 자꾸 생각으로 대처하면서
'어떻게?'만 찾고 구하거나, 회피 외면하면서 적당히 생각으로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 해탈할 수가 없습니다. 유일한 길은 오직 번뇌를 스승으로
삼아 닥쳐오는 그대로 다 용감히 마주하면서 그들의 공성(환영성)을 지켜봄으로써
그를 통해 점점 더 마음의 힘, 즉 법력(法力)을 기르는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언제까지 똑같이 괴로움이란 문제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실 속에서 재수만
하실겁니까? 고해(苦海)라는 인생 시험에서 당당히 패스하여 합격하셔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모든 괴로움의 본질은 다 내가 그걸 공하게 보지 못하고 실재로 본다는
점에서 다 똑같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진짜 빈 배, 무아로 본다면 그것들이 그런 힘을
가질까요? 결국 다 내가 문제와 희생자를 만들어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법력(法力)이란 '정견하는 눈의 힘' 또는' 마음의 밝음'입니다.
역경계와 괴로움이 닥쳐올 때 생각으로 또 과거처럼 번개같이 분별하며 두려워할 게
아니라, 자기 육식 활동이 지금 무슨 짓을 벌이는가를 눈 부릅뜨고 지켜보며 그들의
환영성을 보고 그로부터 깨어나는 진실을 보는 힘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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