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속에 갇혀있는 사람은 존재와 비존재 밖에 모릅니다.
다른 말로는 있다, 없다 밖에 모른다는 거지요. 그래서 아무리 말을 잘한다 해도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만 왔다 갔다 한다면 그는 아직 O을 모르는 겁니다.
이것을 [생각의 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내가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전혀 모르거나, 생각 조차 안해본
신기하거나 불가사의한 뜻밖의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에 대해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꿈에서 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런 것은 아직
말과 글 등의 어떤 소통 수단으로 접하거나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각 밖의 일] , [생각 아닌 일]이라 합니다.
‘있다 없다’나 ‘존재, 비존재’ 같은 말들은 다 생각의 일입니다.
반면에 생각 아닌 일은 생각의 대상이 안되므로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의 대상이 안되는 이유는 명색(名色; 이름과 모양)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양이라면 우리는 물질적으로 형체를 가진 걸 표현하는 거라 여기지만 불교에선
모양(模樣)이란 생각과 느낌으로 표현 가능한 모든 걸 다 모양이라 합니다.
즉 "어머나, 아뿔싸, 표현 불가다, 알 수 없다, 사랑, 기쁘다"등이 다 모양입니다.
그런데 주의하실 것은 ‘생각의 일’과 ‘생각 밖의 일’이란 말조차 모양이란 겁니다.
왜냐하면 ‘생각 밖의 일, 생각 아닌 일’이란 말 자체가 또다시 생각 속에 들어와버린
개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아니던 것을 생각 속에 끌어들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으로 선(禪)을 공부하는 대다수 초보 분은 매우 조심하셔야 합니다.
‘한생각 일으키면 이미 잘못되었다’는 말은 바로 이걸 가르키는 것입니다. 즉 ‘생각
밖의 일, 생각 아닌 일’이라고 말하고 쓰는 순간 그것도 생각의 일이 되어버린 것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 아닌 것]을 발견하고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해답은 ‘생각이 솟아나오는 생각하기 직전’의 자리를 보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내 생각이 과연 지금 어디에서 솟아납니까? 감정과 느낌은 어떻습니까?
대부분 그걸 몸이라고 착각하나 실은 몸이란 것 조차도 생각 아니면 느낌입니다.
모든 생각과 느낌이 솟아나오는 곳이 지금 어딘가를 자세히 정견해보십시오.
그것은 있다, 없다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래서 비유비무(非有非無)라고 해도 틀리는
자리입니다. 왜냐면 '비유비무'도 생각의 일이니까요. 대체 어디 있을까요?
생각을 떠나 가만히만 있으면 나란 생각이 들기 이전의 '있는 그대로'가 바로 이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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