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교에선 한결같이 깨어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깨어남’이 무엇이냐에 대해선 종교마다 해석이 다르지만 선불교에선 생명 법신의
자리를 보고 부모 미 생전 자기의 본래 정체성에 분명하게 깨어나는 걸 말합니다.
깨어남을 위해선 나 이전에 있는 대 생명 법신 또는 제 9 식의 첫번째 자리를 봐야
하는데 그럴려면 아직 이자리를 보지 못한 중생을 위해 두번째 자리(제 1 식부터
8 식까지의 제 9 식이 만들어낸 생각, 감정, 느낌 등)를 이용해서 접근합니다.
이것을 흔히 달(9 식)과 그를 가르키는 손가락(6 식의 생각 등)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첫번째 자리란 아직 생각이 개입하기 이전 생명 활동 그대로(9 식)를 말합니다.
예를 든다면 풍경이 보이거나 종소리가 들릴 때 그에 대해 생각이 ‘멋있다’거나
‘종소리구나’라고 분별을 일으키기 이전의 원래 있는 그대로의 소식을 말합니다.
풍경이나 소리(음악)를 생각으로 원래 그대로 저장, 기억할 수 있습니까?
맛이나 냄새도 가능합니까? 하지만 우리는 이 물질 세상을 잘 살기위해서 필요한
언어 생각을 활용한 이래 이젠 두번째 자리인 생각, 감정, 느낌 등에 깊숙히 중독되어
첫번째 자리를 몽땅 다 잊은 채 오로지 두번째 자리(생각) 속에서만 살고 있습니다.
우린 평생 동안 수많은 생각, 감정, 느낌들 속에서 살아왔지만 어떤 것도 계속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생각, 감정, 느낌들을 일으키고 경험하며 사라지게 하는
배후 바탕의 늘 살아있는 이 첫번째 자리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상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지요. 이자리를 직접 보고 체험하는 것이 성품 자리에 ‘깨어남’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생각의 아는 기능을 갖고 이자리를 봤다고 착각, 해석합니다.
제가 ‘아는 게 아니라 되는 것이다’란 말을 항상 하지만 아는 것과 되는 것의 차이는
‘흔들림없는 안도감(평화)’과 ‘생각에 미혹당함’이 끝나느냐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두번째자리 생각 속에선 ‘보는 자, 보는 행위, 보이는 대상’의 3 분열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첫번째 자리가 된 사람에겐 그런 분리됨이 전혀 없이 통으로 하나임이
체험됩니다. 지금 한번 생각없이 눈앞을 보세요. 그때도 보는 나, 보이는 대상,
보는 행위가 나눠집니까? 일체가 생명 현상(봄+앎)으로 그냥 한 덩어리일 뿐입니다.
봄+앎이란 것도 실은 방편인 생각(손가락)이니 아직 두번째 자리입니다.
그 말이 붙기 이전(실상)을 체험해보세요. 첫번째 자리에선 아무것도 나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이법(不二法)이라는 겁니다. 첫번째 자리에서 두번째 자리로
떨어지는 순간은 번개같이 찰나에 일어나므로 0.1 초도 안 걸립니다.
또 첫번째 자리에선 시공간도 사라져있습니다. 탐진치나 시비분별도 없으며 옳고
그름이나 좋고 싫음도 없습니다. 생명 법신이자 순수 의식인 첫번째 자리는 그냥
늘 여여하게 홀로 독존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당신의 진면목입니다.
첫번째 자리를 가르키는 생각인 두번째 자리를 법등명이라 하며, 법등명에 의해서
드러난 첫번째 자리를 자등명(自燈明)이라 합니다. 즉 생각을 의지해서 첫번째
자리를 찾아내 발견하고 그를 아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하나됨으로써 비로소
자등명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를 ‘불가역적인 깨달음’이라고도 합니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이니 곧 불퇴전(不退轉)의 경지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 어떤 탐진치나 유혹, 또는 욕망이나 추구심이 전부 환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치 물 전체가 내게 일어난 현상인 물결을 지켜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게 깨어남이 성숙하게 되는 깨달음이며 해탈 열반이자 대자유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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