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란 인간이란 현상이 진리인 본질을 자각하는 과정입니다.
사실은 본질과 현상은 나눠질 수없이 이미 한 덩어리임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안이비설신의라는 육식활동(특히 생각)에 깊이 빠져버린 습성 때문에 그런 눈을
뜨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즉 내면에 본질을 보는 눈(안목)의 등불(자등명)이 켜져야 하는 거지요.
중생은 현상을 분별하는데 온통 마음을 뺏기고 있고, 초견성한 수행자는 잠시
본질(O)은 보았지만 아직은 존재의 중심이 현상쪽에 한참 더 많이 가 있습니다.
견성(이때부터 초지보살이라 함)해야 비로소 존재의 중심이 본질쪽으로 가있게
됩니다. 물론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업습이 있어서 완전한 현상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당히 높은 고수(8지보살 이상)가 되어야 모든 현상
속에서 법력을 발휘하며 다시는 후퇴하지 않는 경지가 된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공부하며 이 같은 방편설(이론적인 가르침)에 너무 현혹되어도 안됩니다.
사실 모든 선지식의 말들은 다 방편들이지 그 자체가 절대적인 법이 아닙니다.
본래 깨달음의 차원은 무유정법(정해진 법이 없다)의 대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중생에겐 망상(현상)을 넘어서 일체가 없는 멸진정(본질)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초견성이후 견처가 분명해진 공부인에겐 번뇌 그대로가
본질의 활동현상이니 둘로 나누지 말라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이 말을 아직
미숙한 이에게 하면 그는 ‘번뇌즉 보리란 생각’이나 붙들고 실제 되진 못한채
안다(이해한다)는 공부나 하게 될 뿐입니다.
정말로 일상속에서 늘 ‘번뇌즉 보리’가 되면 이런 이름들부터 다 떨어집니다.
즉 이건 망상번뇌고 저건 보리본질이란 내 분별부터가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상황을 해석 이해하려는 그런 생각활동이 없어집니다. 남는 것은
모든 것들이 다만 O하나의 다양한 나타남이란 진실뿐입니다.
그래서 육안으로보면 모든게 다 있지만 동시에 법안으로 보면 일체가 거울에
비친 지나가는 영상처럼 다 환영으로 텅비어 보이는 것 뿐입니다. 생각과 감정은
마치 깨끗한 채 텅빈 밝은 방안으로 날아다니는 작은 곤충처럼 보일 뿐입니다.
‘진공과 묘유’란 말도 본질과 현상을 형상 관점에서 달리 표현한 말입니다.
아무 형상이 없으니 진공이요, 형상이 있는 건지 아닌지 애매하니 묘유라하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일체유심조의 신비한 마음작용을 통달한 이에겐 때로는
이 곤충이 나비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용(龍)이 되기도 합니다.
공부의 전반부에 계신 분은 아직 본질과 현상을 나누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후반부로 들어선 분은 이렇게 나누는 모든 이원화된 말들과 법상으로
부터도 벗어나야 합니다.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 분별입니다. 이걸 색즉시공인
동시에 공즉시색, 또는 "있는 그대로"라고도 말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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