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경험은 의식의 바탕 위에서 일어나고 있고 또 일부는 기억되고 있습니다.
경험은 곧 의식(육식) 활동이며 의식 활동이란 곧 오온(생각, 감정, 느낌)입니다.
반야심경은 ‘ 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이라고 가르쳐 주는데 즉 모든 경험이
본래 공함을 정견하면 삶 속의 모든 걱정 근심, 고통과 우울 등이 사라진다는 겁니다.
사실 살아온 수 십 년 세월을 돌아보면 99.99999 %의 경험은 다 사라졌습니다.
이게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즉 ‘응무소주’의 가르침(어디에도
머물지 말라)은 이미 일상 속에서 자동적으로 실현되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0.000001 %의 무의식적인 취착(取着)과 머무름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무위로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다 잊혀지고 사라지는데 내가 유위로 굳이 붙잡고
기억하면서 머무르려고 하다 보니까 모든 불만과 고통, 걱정 근심이 생겨나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즉 모든 삶의 고통은 내가 습관적으로 창조하고 있다는 겁니다.
왜 어떤 경험은 곧 사라지는데 왜 다른 경험은 더 오래 남을까요?
왜 어떤 경험은 즐겁고 좋은데 다른 경험은 괴롭고 거부감 때문에 힘들까요?
이것은 우리가 내면의 미세한 육식 활동을 제대로 정견못한 채 습관적으로
12 연기법에 따라 [육처-촉-수-취-애(증)-유-생….]의 순환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이렇게 아주 미세하게 자기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경험들의
본질과 일어나는 현상(활동) 과정을 자각한다는 말입니다. 경험들의 본질은 모두 다
그 바탕에 [앎]과 [봄]이 있으며, 12 연기 활동은 그 바탕 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항상 먼저 자기 의식 활동의 본질(생명과 순수의식)을 보면서
그 현상 활동의 미세한 움직임들을 통찰하는 힘(혜안)을 길러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혜안(심안)이 미세한 의식 활동(현상) 속에서 본질(의식 활동의 빛)을 볼 때
그는 무작정 습관적으로 부정적 오온을 창조하던 마음에서 점차 벗어납니다.
모든 경험의 본질은 다 정신(의식) 활동이며 그 내용이 뭐든 간에 이 본질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이는 구정물이나 흐린 물이라고 해서 물이 아닐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처럼 모든 경험 현상에서 본질(생명의 투사인 순수한 앎의 빛)을
볼 때 그의 혜안은 법안(법을 보는 눈)이 되며 이게 깨어남의 핵심입니다.
왜 우리는 무의식중에 습관적으로 부정적인 고통과 근심 걱정을 붙잡고 머무르는
창조 행위를 하고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이 모든 게 다 자신이 그저 패턴에 빠져서
만들어내는 무지(무명)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고통조차도 창조해낼 수 있는
이 무한한 나의 능력에 대해 깨어난다면 삶은 한층 더 경이로워 질 것입니다.
나는 무한한 생명이자 정신으로서 지금 아무개의 삶이란 창조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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