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우는 아침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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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나를 바꾸는가?(2026.03.26.) 내가 탐구하고 노력해서 뭔가를 더 배우면서 의도적으로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바뀔만한 환경과 존재 방식 속에서 살아가도록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공부는 더 갖는 게 아니라 다 비우고 내려놓는 역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존재 방식’이란 게 각자에게 있습니다.
소극적인 사람은 그게 잠재의식의 영향인 줄도 모르고 자꾸 현실을 회피합니다.
그 잠재의식을 바꾸면 되는데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규정한 후
그 법칙을 지키려할 뿐 바꿔보거나 비워볼 생각을 안 합니다.
‘사람은 바뀌지 않으므로 바꿔쓰려고 하지 마라’ 할 정도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게 다 사실 자기의 생각과 감정에 오염된 결과라면 어쩌시겠습니까?
수많은 생각과 감정은 조용히 쌓여, 잠재의식을 형성하고 우리를 지배합니다.
깨달음이란 것도 그 본질은 마음에 쌓여진 수많은 오염에서 다 벗어나는 겁니다.
어떻게 벗어 날 수 있을까요? 어떤 단체는 빼기를 한다고 하는데 어떤 오염물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스스로 모르는데 대상을 모르는 채 뭘 뺀다는 말입니까?
게다가 빼서 더 잘 되려고 하는 주체인 에고(나)는 끝까지 남아있지 않습니까?
심리 상담을 해서, 혹은 몸의 상태를 바꿔서 에너지를 긍정 상태로 바꾸면 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때의 문제는 몰라도 인생 전체를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게다가 몸은 늙으면 자연히 여기저기 아프고 약해지는데 에너지를 바꾼다구요?
인간 존재를 잘 살펴본다면 세월이 흘러도 바뀌지 않는 것은 딱 하나 뿐입니다.
그건 내면에서 모든 대상과 나를 바라다보는 ‘시선이자 즉각적인 앎’ 뿐입니다.
이것은 늙거나 늘고 줄거나 사라졌다가 나타나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즉 내 삶에서 모든 일과 대상들에 대해 이 시선을 되찾고 즉각적 앎 그 자체로서
존재하기 시작할 때(이를 ‘정견’이라 한다) 비로소 나는 바뀔 수가 있습니다.
단 이때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나와 내 일조차 마치 제 3 자나
다른 사람의 일처럼 객관적으로 거리감을 둔 채 무심하게 봐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마치 타인들이 장기나 바둑을 둘 때 제 3 자의 시선에서 묘수나 문제가 훨씬
더 잘 보이는 사실과 같습니다.
무심하게 볼수록 과거가 지금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잘 보입니다.
문제나 장애가 보인다면 그걸 고치는 건 별 게 아닙니다. 몰라서 못 고치는거지
오염물과 꼬인 문제가 다 보이는데 그대로 둔 채 안 고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게다가 이 정견은 이미 누구나 다 저절로 CCTV처럼 녹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일과 심리 상태가 남아 지금도 영향받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당신의 존재 방식 속에 이미 실행되고 있는 ‘정견’의 시선을 찾아내세요.
그리고 그곳에 의식의 초점과 무게 중심을 확실하게 두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살아가면서 저절로 점처 바뀌게 됩니다. 과거엔 안 보이던 불순물과
문제가 훤히 보이는데 그걸 붙잡고서 못 버리는 이는 없습니다. 즉 나는 바꾸는 게
아니고 바뀌는 겁니다. 본래 그대로의 법을 보고 그대로 살지 못하는 나를 본다면
누구나 깨어나고 바뀌게 됩니다. 이걸 법등명, 자등명이라고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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