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에서의 마음공부란 중생심을 벗어나 해탈성불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누구나 몸, 마음, 그리고 ‘이것’으로 표현되는 알 수 없는 생명으로서 존재합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은 생명의 일시적 자기표현이지 결코 생명 그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린 여태까지 몸과 마음을 자기의 중심으로 삼고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 삶은 고통으로 가득찼고 마음은 권태와 번아웃으로 황폐화가 되었지요.
이것은 무엇이 나란 현상의 뿌리이고 본질인지 모른채 다만 변해가는 몸과
변덕스런 마음(오온)만 따라오다보니 결국 도착한 삭막한 임시 정거장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은 ‘조견 오온개공도 일체고액’이란 공부법을 가르쳐 줍니다.
오온이란 곧 몸과 마음(생각,감정, 감각)을 말합니다. 즉 더 이상 몸과 마음을
내뿌리 근본으로 삼지말고 내생명이 꽃피운 일시적 현상으로나 보란 것입니다.
예수는 천국가는 길을 누가 묻자 “네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답했습니다. 이 말은 곧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생명본질)에 집중하란 겁니다.
사람도 딴데 더 정신을 팔면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괴로운 줄도 모릅니다.
딴 것을 더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의 반응에 관심이 덜한 것입니다.
당신은 그토록 생명에 집중해 열렬히 사랑하며 하나되려 애쓰고 있습니까?
그게 바로 진짜 공부입니다. 내 할 일 다하고 내몸에 더 집중하면서 시간내서
가끔 관심 갖는 그런 어설픈 공부로는 죽을 때까지 해도 달팽이 신세입니다.
핵심은 방법이 아니라 정신의 집중된 밀도와 방향입니다.
미친 사람에겐 범인은 알 지 못할 에너지가 그를 감싸고 있지요. 마찬가지로
진리인 생명에게 그토록 올인하면 생명의 빛과 은총이 그를 감싸줍니다.
이걸 성화(聖畵), 불화(佛畵)에선 머리 뒤의 후광(아우라)으로 나타내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나와 내것에 습관적으로 집착하던 탐욕심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심신이 말할 수 없이 가볍고 밝아지는데 이것이 바로 비3차원적 존재인 생명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를 지키던 습관적이고 무거운 마음패턴에서
벗어나 아무런 규정(생각)이나 한계를 갖지않아 자유롭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쎈 역경계가 닥쳐와도 전처럼 아우성치지 않게 됩니다.
역경계가 힘든 것은 내마음이 지금 딱 고만한 것에 힘든 어린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이는 장난감 때문에 역경계를 경험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몸과 마음이 만든 에고의 무게(윤회를 만드는 카르마의 중력)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암시합니다. 즉 당신의 지금 수준의 마음에서 벗어나야만 지금
가진 고통(걱정근심)에서 벗어날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화염경의 사법계
(四法界)가르침은 어떻게 일상속에서 공부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공부할 때 가장 어려운게 내생각(규정)이 옳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사법계는 내가 네가지 무애(걸리고 막힘없음)가 되어 삶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되는 네가지 길(이무애, 사무애, 이사무애, 사사무애)을 제시합니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지금 제생각속에서 누가 더 옳으냐가 아닙니다.
내가 내생각의 굴레와 장애를 보고 그로부터 벗어날 때 누구나 대자유함과
생명이 본래 가진 큰 사랑과 자비심을 증득하게 됩니다. 그때까지는 누구나
진짜 반야(진리)를 가진게 아니라 다만 반야에 대한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래도 이런 문제가 있고 저래도 저런
문제는 계속 생겨나는게 삶입니다. 하지만 그모든 문제에 전혀 걸림없이 자유한채
무한히 열린 가슴, 즉 자비와 사랑으로 모든 문제와 갈등을 대할 때 오히려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소된다는 말입니다.
일상속에서의 마음공부는 이렇게 사무애(四無碍)의 가르침이 이끄시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럴때 우린 어떤 역경계에서도 대자유함과 고통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커다란 사랑과 무한한 자비심을 증득함양하게 됩니다. 이걸 다른말로 영원성, 즐거움,
참된 나, 깨끗함을 무한히 누리는 열반사덕이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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