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과 파도가 물과 따로 있지 않듯이 현상과 본질도 늘 같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제 눈이나 감각에 보이지 않기에 ‘없다’고 속단합니다.
그러나 내게 없다 해서 진짜 없는 게 아니요, 있다 해서 진짜 있는 것 만도 아닙니다.
왜냐면 있다, 없다는 다 내 생각과 감각 느낌이 잠시 분별한 환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은 있다, 없다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는 게 아닙니다.
있음(색)과 없음(공)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에서도 보듯이
다만 양변의 어느 한쪽에 치우친 분별심의 표현이지 중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깨어나면 이 세상이 ‘다 있는데 동시에 없다’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달리 말해 모든 대상의 있음과 없음이란 보고 분별하는 자의 의식 활동과
절대 분리할 수 없는 연기법의 관계 속에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무엇이 있거나 없는 현상은 그렇게 분별한 내(본질)가 있음을 가리키고 있는 겁니다.
중생계를 욕계, 색계, 무색계로 나누지만 달리 말하면 의도(욕심), 색, 공의 세계란 말도 됩니다.
그러나 부처의 눈은 그 어느 한 세계 만에도 갇혀있지 않은 채
늘 전체가 하나로서 어디에도 치우침 없이 자유롭습니다.
왜냐면 부처가 곧 눈(眼)이요, 일체 다 없음이자 동시에 일체의 모든 것이며
또한 모든 의도와 욕망이자 그 모든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절대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달리 말해서 이 모든 것들을 다 창조하지만
그 어떤 창조된 것(분별로 나타난 것)만에 갇힌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게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권능을 달리 표현한 게 아니면 뭐겠습니까?
그래서 부처가 곧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안목이 여기까지 꿰뚫어 보지 못하는 중생은 아직도 욕계나 색계,
혹은 공의 무색계 속에 갇혀서 현상과 본질을 자꾸 나누기에
제 눈에 걸맞는 파동만 보게 되니 결국은 그 수준 만큼의
너와 나, 선악, 옳고 그름 같은 환영 세계가 지금처럼 나타난 것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나 석가나 한결같이 마지막 진리를 ‘자유’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평화나 행복, 사랑이나 은총을 지복과 천국의 증표로 삼지만
실은 그런 것들은 하나님(부처)의 활동 현상일 뿐 본질은 ‘대자유’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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