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4 차원은 공간의 적분(시간 축을 추가)를 말하지만
종교와 영성 분야에서 말하는 4 차원은 조금 다릅니다. 현대 물리학적으로 말한다면 오히려
무한 차원이란 말이 어울리겠지만 3 차원의 바탕 자리가 된다는 관점에서 4 차원이란
말을 잠시 빌려 써보겠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1 차원(점)은 2 차원(선)에, 2 차원은 3 차원(공간) 속에 있습니다.
그러면 공간은 무엇 속에 있는 걸까요? 생각으론 공간은 스스로 있지 않나 하겠지만
실은 중생의 마음(6 식 활동)이 3 차원에 있는 곳입니다.
우린 마음이 활동 안 하면 공간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렇게 의식이 활동하진 않지만 6 식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자각할 때 이것을 무심(무념 무상)하다고 합니다. 이를 굳이 표현하자면 텅 빈 허공과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역시 마음(6 식)이 움직인 결과로 나온 생각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텅 빈 허공이란 것도 3 차원 관념(생각+느낌)이란 말입니다.
뭐라고 분별만 하면 다 3 차원적 생각 관념입니다.
마음이 움직이기 이전, 예컨대 아침에 막 눈을 떴을 때 우린 그냥 순수 투명한 의식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 3 차원이 스스로 있던가요? 아닙니다.
6 식이 활동해야 비로소 3 차원 공간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의식이 스스로 의식할 때가 각성(覺性)입니다.
이자리를 4 차원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긴 그 어떤 관념이나 단어도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사들은 깨달음을 ‘이거다 저거다’하면 이미 (3 차원) 생각이니
‘개구즉착’이라면서 혼내거나 할봉을 휘둘렀던 것입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3 차원 시공간은 마음이 6 식활동(분별심)으로 만들어낸 환영일 뿐이란 것이지요.
이 3차원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바탕을 4 차원이라고 이름(名)을 붙여보자는 겁니다.
묘유(妙有)라 해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이자리는 사실 말로 이름 붙일 수가 없는 자리에 억지를 부린 겁니다.
즉 4 차원을 표현하려는 순간 이미 3 차원적 환영 세계로 다시 빠져버리니까요.
그런데 꿈도 없는 깊은 숙면 시엔 이게 자각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게 끊어진 상태를 진공(眞空)이라고 표현하면서 진공에서 묘유를,
묘유 자리에서 진공을 비춰 보는 상태를 견성이라고 합니다.
이걸 쌍차 쌍조(서로 비춤)라고도 하지요.
즉 견성은 일체 끊어짐(멸진정)의 자리를 보고 체험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자리에선 깨달음(부처)을 이거다 혹은 저거다 하며 이름 붙여가며 뭐라고
표현할 수나 있겠습니까? 그건 다 3 차원 분별 환상 세계 속의 망상(생각)일 뿐입니다.
물론 3 차원 세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필요 상 어쩔 수없이 6 식을 굴려서 3 차원을
창조하는 4 차원을 가리켜 보이는 행위(달이 아닌 손가락)는 해야겠지요.
하지만 깨달음 자리는 3 차원 속 그 어떤 생각이나 느낌(6식 활동)으로도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표현은 이거지요. "지금 말과 글로 이거다 저거다 하는 바로 그놈이다.
말의 내용에 떨어지지 말고 지금 이 생생한 것, 생각을 움직여 말과 글로 표현하는 이것을 봐라!"
그런데도 아직도 말과 글 이전 자리에서 모든 말과 글로 표현하는 이것은 보지 못한 채
자꾸 '이거다 저거다'만 하고 있다면 그게 무슨 말이건 간에 다 생각 아닙니까?
(달이 아닌 손가락인) 생각만 가지고 '이거다 저거다'만 하고 있다면 다 번뇌 망상이 아닙니까?
나랑 같은 단어를 쓴다고 좋아하고 다른 단어를 쓴다고 싫어합니까?
부디 정신 차리고 지금 즉시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세요.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