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음은 생명현상의 본질이요, 번뇌는 일시적 현상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손으로 새나 개 얼굴을 만드는 그림자 놀이와 같습니다.
즉 깨어있음이 빛이라면, 번뇌는 손이 만든 일시적 모습의 그림자란 겁니다.
그림자는 빛이 없으면 만들어지거나 존재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빛은 무시하고 습관적으로 그림자를 더 중시합니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빛은 늘 아무데나 있지만 그림자는 그것 하나 뿐이니까요.
게다가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의 어두움은 상대적으로 점점 강해집니다.
이것은 자연속에서나 내면에서나 똑같은 빛의 속성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빛이 강할수록 어두움은 상대적으로 약해진다는 말도 됩니다.
‘깨어있음의 힘으로 번뇌를 조복받는다’ 함은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걱정 근심거리가 생겼다 할지라도 그걸 해결할 방도가 어느 정도 있다거나 혹은
반드시 해결해 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면 그 걱정 근심은 상대적으로 약하게 됩니다.
반면에 그걸 자꾸 되새기고 걱정하면할수록 그 힘은 점점 더 증폭되면서 나를 자꾸
힘들게 만듭니다. ‘번뇌 운동’도 습관이라 반복할수록 번뇌의 힘도 강해지니까요.
물론 번뇌를 조복받으려면 깨어있음의 힘이 번뇌의 힘보다 당연히 커야합니다.
어떻게 힘이 더 강해질수 있을까요? 의식이 순수의식(텅 빈 나 있음을 아는 앎)에
집중해서 하나로 되어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존재의 모든 에너지가 집중됩니다.
이것은 '무위(無爲)로 그냥 있음'이지 내가 어떻게 요령부리는 게 아닙니다.
그냥 가만히만 계속 있어보세요. 그러면 ‘무위(無爲)로 있음’의 힘이 얼마나 큰지
자각 체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마치 큰 비행기가 허공에 떠서 날아가도록
허공에 충만한 대기의 힘(양력)이 부양해 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가만히 무위로 있는 채 마음의 습관적 ‘번뇌 운동’을 지켜보면 됩니다(정견).
전엔 무심코 번뇌 운동에만 의식을 온통 집중하고 따라갔지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텅 빈 나 있음을 그저 지켜보는 앎(의식)에 좀 더 강한 의식을 집중하면 됩니다.
처음엔 99;1%의 비율로 시작해서 나중엔 50;50까지 가보세요.
이걸 집중해서 반복하다 보면 번뇌의 힘도 상대적인 에너지로서 내가 그 수위를
조절할 수 있는 상대적인 생각과 감정의 힘 에너지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견을 통해 내 뜻대로 번뇌의 힘을 살살 조절할 수도 있게 되는 겁니다.
결코 번뇌에 대항해서 대립하고 단칼 승부로 싸우란 게 아닙니다.
그냥 우리집 마당에 어디선가 험한 개가 한 마리 들어왔는데 그 놈을 내쫒으려면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아무런 먹이(추가 생각)도 주지 않은 채, 계속해서 째려 보면
마침내 제가 불편해서 나가 버린다는 말입니다.
이게 농담이 아닙니다. 모든 생각이 걱정 근심을 만들면 상념체가 됩니다.
상념체는 하나의 정신적 에너지체라 사람의 추종과 추가 생각이란 땔감 먹이를
필요로 합니다. 그게 상념체를 모시는 행위이며 그의 노예가 되는 길이지요.
우리는 여태껏 그렇게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삶의 방식을 대대적으로
바꿔볼 때가 왔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삶에 아무런 부귀 영화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깨어있음으로써 번뇌란 마음의 장난을 굶기고 힘을 약화시켜 내쫓아버리는
참 주인의 삶을 되찾아 '상락아정의 삶'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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