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온갖 종류의 다양한 감정들을 다 경험하는 게 사람의 삶입니다.
그 중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나 슬픔, 우울감, 공포감 등을 직면할 때 가장
힘이 듭니다. 대부분은 에고(살아온 업력)가 시키는대로 충동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리고는 대다수는 긴 시간을 두고 후회하지요.
사실 인간에게 큰 통증과 부정적 감정을 직면하는 것만큼 힘든 게 없습니다.
육체의 통증은 덜어주는 약이라도 있지만 감정은 그런 회피 수단도 없습니다.
사람은 제 인생을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고 노년에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피우고
싶어하지 고통 번뇌 속에서만 살다 보람없이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지요.
그래서 감정에 직면하는 방법은 공부인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누구나 인생에 별 기복이 없이 가능한 순탄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삶을 풍요롭게 살아 본다는 관점에선 순탄한 삶은 별로 좋은 게 아닙니다.
물질적인 풍요와 달리 정신적인 풍요란 자기 삶 속에 일어나고 경험했던 모든
감정의 잔해(찌꺼기가 남긴 불순물)들로부터 지혜와 인내심을 통해 완전하게
감정의 소용돌이(인력)에서 벗어난 이후에 찾아오는 다양한 삶에 대한 흔들림없는
존재의 기쁨과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즉 흔들리지 않음(부동지)은 무수한 흔들림을 통해 얻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물론 그 흔들리는 과정 속에서 에고(과거의 나)는 너무나 힘들어 하면서 자기의
고통이 ‘어디에서 누구(무엇) 때문에 왔다’며 그 대상을 미워하고 저주합니다.
그래서 그 대상을 비난하고 헐뜯으며 자기 에고를 위로하고 정당화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건 부처님이 말씀하신 ‘독 화살’ 얘기 바로 그거 아닙니까?
“난 이 화살을 누가 왜 쏘았는지 알기 전에는 뽑지 않고 치료하지도 않겠다”가
바로 중생인 우리들의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마음 상태라는 거지요.
우린 늘 고통보다 나란 에고의 합리화와 정당성을 더 중요시 합니다.
즉 생각의 노예로 살기 때문에 그런 논리가 없으면 더 괴로워지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깨어난 이는 그런 부질 없는 에고(육식 활동의 내용물)에 휘둘리지 않는 채
다만 자기의 고통을 직면하면서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오늘 제가 말하고 싶은 ‘진정한 직면의 화두 참선’이예요.
사람들은 생각으로 만든 화두만 가지고 참선하는 줄 알지만 더 효과적인 화두는
생각보다 감정입니다. 생각이 만든 의문심을 집중되는 상태로 만들긴 어렵지만
감당하기 힘든 폭풍같은 감정은 바로 그 상태로 나타나 직면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정말 자기 인생을 풍요롭게 살고 싶은 사람은 지금 이 감당하기 어려운
뜨거움이나 통증같은 감정을 직면해서 인내하면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이게 바로 ‘진짜 살아있는 생명 활동을 직면하는 화두 참선’인 것입니다.
물론 화두 참선이니까 당연히 ‘이 뭣꼬?’의 관점은 가져야지요.
그렇지 않아도 되지만 제 경험상 그러면 묵조선이 되고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빠져
나오는데 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즉 감당하기 어려운 압도적 감정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를 스스로 두 눈 딱 부릅뜨고 지켜보면서 맞장떠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에고의 한계가 타버리면서 막혔던 거대한 장벽이 무너지듯이 에고가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즉 에고가 ‘이건 내가 못참는다’는 그 경계가 확 무너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찾아오는 엄청난 평안과 자유로움이란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습니다. 이건 도전해 본 사람만이 아는 꽃과 열매인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내가 너무 그렇게 도전하기 어렵다'거나 '힘든 에고를 돌본다'는
합리적인 미명 하에 자기 에고와 타협하지 마세요. 그것은 살아 남고자 하는 에고의
속삭임입니다. 한번에 안 되면 열번 도전해 작은 그릇을 깨야만 큰 그릇이 됩니다.
이것이 자기 감정에 노예로 휘둘리며 살지 않고 자유를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어렸을 때 그렇게 무섭던 것들이 성장하면서 별로 무섭지 않게 되듯이 지금도 나의
정신 수준은 아직 어린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더 성정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감정에 직면하기'를 가능한 자꾸 시도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감정에 패배하여 적당하게 합리화 하면 그 다음에 흘러갈 수순은
필연적으로 상대를 헐뜯고 비난하면서 시비분별함으로써 나를 정당화하는 에고의
작업을 따라가게 될 뿐입니다. 이치가 이렇기에 모든 가르침들은 한결같이 세상과
타인을 시비분별하지 말고 '먼저 너 자신을 똑바로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자기는 안 보고 남만 시비분별하며 탓하시는 분들 부디 정신 좀 차리시길 바랍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