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체가 되어 이것(진리)을 찾지 마세요.
그러면 반드시 주체,행위, 객체(대상)로 나뉘게 됩니다.
원래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 당신의 마음 속에서만 셋으로 말이지요.
그냥 나와 내 행위를 뭔 짓을 하던 간에 가만히 지켜만 보세요.
따라서 “이것이구나!” 하는 놈이 있다면 그게 바로 에고(생각)입니다.
이처럼 에고는 진리를 찾아내는 데까지는 갈 수 있지만, 그 너머로 나아갈순 없습니다.
그 너머에는 O과 분리되어선 아무것도 따로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이것’을 찾는 순간 ‘이것 아닌 것’도 덩달아 자꾸 생겨납니다.
하지만 O은 둘 셋이 아닌 ‘단 하나’라고 또 생각으로 규정(분별)하지 마세요.
그러는 한 그것은 또 다른 ‘이것’의 한 형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 속에선
항상 ‘이것’이 탄생하는 순간 동시에 ‘이것 아닌 것’도 같이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이것’ 하더라도 그것은 늘 방편(손가락)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가 무유정법(정한 법이 없다)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방편상으론
‘이것’이라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이것 아닌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라곤 해도 실상은 어떤 특정하는 것이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이걸 ‘있는 그대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이걸 알면 비로소 에고가 진리를 보는 혜안(慧眼)에서, 존재의 중심이 뒤바뀌어서
거꾸로 진리가 에고를 바라보며 살리고 죽이는 법안(法眼)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과 ‘이것 아닌 것’사이에서 방황하지 마세요.
그리고 둘 다 생각이 나눈 이분법이며 생각이 만든 분별임을 명확히 보셔야 합니다.
그럴 때 당신은 지금 이 작업을 하는 '살아있는 무엇(진짜 이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럴 때 당신은 혜안을 가진 에고(나)에서 법안을 가진 그 무엇, 도무지 알 수 없고
말로 규정할 수도 없지만 지금 여기에 충만한 의식(생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것'은 이런 실상을 알아보는 지혜의 안목(눈)입니다.
그러나 '이것 아닌 것'도 동시에 그 눈을 피할순 없습니다. 그래서 다 O입니다.
이렇게 탁 깨어나 활짝 눈이 열리면 저절로 실상과 허상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이것'과 '이것 아닌 것' 사이에서 생각으로 오가지 않을 것입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