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동화인 ‘미녀와 야수’는 진실한 사랑이 야수를 왕자로 바꾼다는 얘기입니다.
이 얘기는 중생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이 가능합니다. 즉 야수를 '마법에 걸린
중생'으로 바꾸고 왕자를 '부처'로 바꾼다면 똑같은 패러다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법에 걸린 중생’은 곧 에고가 주인인 나, 중생이 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미녀의 사랑’은 과연 무엇에 해당할까요? 저는 그것을 사홍서원의
‘번뇌무진 서원단(煩惱無盡 誓願斷)’과 ‘불도무상 서원성(佛道無上 誓願成)’을
향해 무한 도전하는 ‘강력한 일편단심의 정신’’이라고 봅니다.
진리를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 곧 지고지순한 사랑입니다.
요즘 프리즘 9월 독서교재 [모든 것이 산산이 무너질 때]란 책을 보고 있는데
이 책에서도 “아무 것도 붙잡거나 의지하지 않고 모든 역경계를 고스란히 견뎌
내는 정신(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세한 각론에 가서는 “내 에고의 고통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라, 화살을
꽃으로 바꾸라, 자비심으로 평화와 행복을 베풀라, 독을 약으로 삼아라, 목표가
곧 과정이며 일상 속에 열반의 삶이 같이 있다” 등 주옥같은 가르침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구체적 방법론들은 기본적인 단 하나의 전제를 필요로 하는데,
그게 진리를 향한 정신적인 힘 에너지인 일편단심의 사랑, 즉 번뇌무진 서원단,
불도무상 서원성을 이루려는 무한 도전 정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열반과 해탈이 어디에 따로 있는 게 아니며 바로 일상의 평범한 삶 속에 '진리를
향해 꽃 피어나는 빛나고 향기로운 정신 승리의 결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험난한 삶 속에서 온갖 역경계가 닥쳐 올 때에 그것에 휘둘려
누구를 비난하고 시비분별하며 헐뜯을 게 아니라 그런 내 마음을 돌아보면서
진리를 이번 생에 반드시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정신으로 자기의 흔들리는
마음 자세를 다스리고 성찰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게 진리를 향한 법력이 됩니다.
해탈과 성불이란 곧 ‘천상천하 유아독존’하는 본래 성품의 관점과 눈으로 현실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야 나와 대립되는 네가 있고 밉거나 싫거나
못마땅한 이가 있어도, 대상을 통해 그 대상과 결코 둘이 아닌 참나로서의 나를
돌아보며, 이모든 흔들림의 경계를 넘어서 마침내 일체에 대한 에고의 분별 영역
에서 훌쩍 날아가는 새처럼 정신적으론 확실하게 자유로워져야 하는 거지요.
댓글(0)